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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천년의 문자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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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한글박물관 상설전시, 훈민정음, 천년의 문자 계획, THE PERMANENT EXHIBITION AT THE NATIONAL HANGEUL MUSEUM, HUNMINJEONGUM, THE DESIGN OF A WRITING SYSTEM BEYOND THE MILLENNIA, 문화체육관광부 국립한글박물관
  • 훈민정음, 천년의 문자 계획
  • 전시 개막
    2022년 1월 21일
  • 전시 장소
    상설전시실(2층)
  • 전시 구성
    1부   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
    2부   내 이를 딱하게 여겨
    3부   스물여덟 자를 만드니
    4부   쉽게 익혀
    5부   사람마다
    6부   날로 씀에
    7부   편안케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전시 소개
1443년 세종은 우리의 문자 ‘훈민정음’을 만들었습니다.
1446년에는 새 문자를 만든 목적과 원리를 밝힌 책 『훈민정음』을 만들었고, 『훈민정음』의 머리말에는 세종이 ‘훈민정음’을 통해 꿈꾼 새로운 세상이 설계돼 있습니다.
전시장은 『훈민정음』 머리말의 문장에 따라 7개의 공간으로 구성됐습니다.
  • “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
    중국의 한자를 빌려 말에 맞지 않는 글을 쓰던 시절
  • “내 이를 딱하게 여겨”
    제 뜻을 글로 표현하지 못하는 백성을 딱하게 여겨
  • “스물여덟 자를 만드니”
    쉬우면서도 사용이 편한 스물여덟 개의 글자를 만들었습니다.
  • “쉽게 익혀”
    다양한 지식과 문화를 쉽게 익히고
  • “사람마다”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한글로 서로 소통하기를 바란 것이죠.
  • “날로 씀에”
    한글은 우리의 공식 글자가 되어 날로 쓰이고 있으며
  • “편안케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오늘날 많은 사람이 한글로 편하고 이로운 생활을 누리고 있습니다.
세종이 설계한 천년의 문자 계획이 담긴 『훈민정음』을 따라, 빛나는 한글의 역사와 한글로 이룩된 한글문화의 무한함을 느껴 보시기 바랍니다.
1부 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
세종(世宗, 1397~1450)의 시대에도 우리말은 중국말과 너무나 달랐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말을 적을 글자가 없었기 때문에 중국의 글자인 한자를 빌려 쓰는 안타까운 상황이었습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의 다른 많은 나라와 민족도 상황은 비슷했습니다. 우리나라는 ‘이두(吏讀)’ ‘구결(口訣)’ ‘향찰(鄕札)’ 등의 방식으로 한자를 응용해 우리말을 적기도 했으나, 이는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 퍽 어렵고 불편했습니다. 한자를 배운 일부 계층을 제외한 많은 사람은 여전히 글자를 읽고 쓸 수 없는 시절을 보내야 했습니다.
2부 내 이를 딱하게 여겨
세종은 글자를 몰라 자신의 뜻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는 백성들을 위해 한글을 만들었습니다. 글자를 아는 것이 곧 권력이었던 시절, 누구보다 큰 권력을 가졌던 왕이 모두가 누릴 수 있는 쉬운 글자를 만든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세종의 한글 창제는 이처럼 백성을 깊이 사랑하는 애민 정신을 비롯해 중국과 다른 우리만의 글자가 필요하다는 자주정신, 실생활에 쓰임이 있어야 한다는 실용 정신을 바탕으로 이루어졌습니다.
3부 스물여덟 자를 만드니
1443년 세종이 만든 한글은 그 당시 ‘훈민정음’이라 불렀는데 자음 글자 열일곱 개와 모음 글자 열한 개를 합한 스물여덟 개의 글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어떤 백성이라도 누구나 쉽게 배워서 편히 쓸 수 있도록 만든 한글은, 그 창제 목적에 맞게 모양이 매우 단순하고 글자의 수가 적었습니다. 발음기관의 모양을 본뜬 다섯 개의 기본 자음 글자는 소리의 세기에 따라 획을 더함으로써 열일곱 개의 글자로 확장했고, 하늘·땅·사람의 모양을 본뜬 세 개의 기본 모음 글자는 각 글자를 서로 합성함으로써 열한 개의 글자가 탄생했습니다. 세종이 만든 쉽고 간편한 스물여덟 개의 글자는 ‘슬기로운 사람은 아침나절에 깨우치고,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열흘이면 배울 수 있는’ 임금이 백성들에게 내리는 배려와 소통의 문자였습니다.
4부 쉽게 익혀
세종은 우리 백성들이 한글을 통해 삶에 필요한 학문과 지식을 쉽게 익힐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그리하여 한글 창제 초기에는 당시 민간에 널리 퍼져 있던 불교의 가르침을 담은 불경을 한글로 펴냈습니다. 이후에는 주로 유교 경전을 번역해 한글로 옮김으로써 조선의 통치 이념을 널리 알렸습니다. 그런 세종의 뜻이 이어져 16세기 말 임진왜란 이후로는 구황, 질병, 무예 등의 실용 지식과 제도‧법률에 대한 정보를 한글로 보급하기에 이르렀지요. 이처럼 국가나 기관 차원에서 대량으로 생산된 인쇄본들이 각 지역으로 퍼져 나가면서, 한글은 지식의 보급과 공유의 중요한 도구로 자리 잡아 갔습니다.
5부 사람마다
세종은 모든 사람이 한글을 통해 신분이나 성별에 상관없이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신분이 낮은 사람이나 여성만 사용했다는 일반적인 편견과 달리 실제로 한글은 왕부터 노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사용한 글자였습니다. 왕족들이 서로 한글 편지를 주고받은 자료들과 양반 여성이 한글을 통해 억울함을 호소한 문서들이 여럿 남아 있습니다. 이 밖에도 다양한 생활용품에 물건의 수량이나 주인의 이름을 한글로 적기도 하고, 삶의 희로애락과 지혜를 담은 각종 문학서와 실용서들이 한글로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이처럼개인의 일상생활 곳곳에 한글이 스며들면서, 한글은 모든 백성이 생각과 감정을 공유하는 소통 도구로 자리 잡게 됐습니다.
6부 날로 씀에
세종이 1443년에 만든 한글은 450여 년이 흐른 1894년에야 공식적인 나라의 글이 됐습니다.
국가나 공공 기관에서 공적으로 작성한 문서에서는 여전히 한문이 먼저였던 문자 생활에서 한글이 새롭게 주목된 것입니다. 한글이 비로소 국문(國文)으로 불리게 된 기쁨도 잠시, 1910년 일제에 나라를 빼앗김에 따라 한글도 국문의 지위를 잃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매일’ 당연하게 쓰고 있는 한글을 자유롭게 쓸 수 없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한 민족의 정체성은 그말과 글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잘 알았던 당대 지식인들은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한글에 대한 연구·정책·교육·문학 활동 등을 멈추지 않았고, 마침내 우리의 말과 글을 지켜낼 수 있었습니다.
7부 편안케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세종은 한글이 보다 나은 문자 생활을 가능케 하고, 이를 통해 모든 사람이 좀 더 나은 삶과 문화를 누리는 세상을 바랐습니다. 『훈민정음』 머리말의 마지막에 쓴 문장처럼 말입니다.
1945년 광복 이후로도 정확한 한글 소통을 위해 각종 표기법 정책들이 만들어졌고, 한글을 보다 편하고 경제적으로 쓰기 위해 모아쓰기/풀어쓰기, 가로쓰기/세로쓰기 등의 문제에 대한 논의가 벌어졌습니다. 또 다양한 서체 연구를 통해 보기 편하고 아름다운 형태를 갖춘 한글 서체들이 개발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사용자에게 편안한 모습으로 끊임없이 변화해 온 한글은 오늘날 문화 창조와 소통의 가장 중요한 도구가 됐습니다. 이러한 특성으로 누구에게나 편한 문자로 거듭난 한글은 세종의 바람대로 늦깎이 학생은 물론이고 신체적인 장애와 다른 언어 배경을 가진 사람까지도 쉽게 배울 수 있는 우리나라의 자랑스러운 문자가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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