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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박웃음 2019. 5. 제 70호 국립한글박물관 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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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기사 / 서울대 국문과 박진호 교수가 소개하는 우리가 몰랐던 세종대왕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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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기사

    서울대 국문과 박진호 교수가 소개하는
    우리가 몰랐던 세종대왕 이야기

    겨레의 스승, 백성만을 알고 한평생을 살아간 희대의 천재 군주.
    우리가 아는 세종대왕은 조선의 태평성대를 이끌고 한글을 창제한 위인의 모습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 감춰진, 가끔은 고집을 부리고 신하들과 다투던 인간적인 모습은 어떠한 형태였을까.
    우리는 미처 몰랐던 세종대왕과 한글 이야기, 서울대 국문과의 박진호 교수를 만나 들어봤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한박웃음 독자들에게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국립한글박물관의 온라인 소식지 독자 여러분 모두 반갑습니다. 저는 스스로 축복받은 국어학자라 말하는 박진호입니다. 제가 국어학자가 돼야겠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한 것은 중학생 때였습니다. 국어 시간이 가장 재미있었고, 문법을 공부하며 우리말글의 질서와 규칙을 배워가는 게 흥미로웠죠. 이 생각은 지금까지도 변함이 없고 국어학자, 그리고 교수로서 사람들과 우리말글을 연구하고 이야기하는 게 행복합니다. 그래서 저는 참 축복받은 사람이자, 학자이고, 교수입니다.

    젊은 층이 사용하는 ‘야민정음’에 대해 긍정적인 인터뷰를 하며 깊은 인상을 남기셨는데요.

    카페 테이블에 앉아 인터뷰하는 박진호 교수 ‘야민정음’은 젊은 층에서 유행하는 모양이 비슷한 글자끼리 서로 바꾸어 부르는 행태를 가리킵니다. 가령 ‘멍멍이’를 형태가 비슷한 ‘댕댕이’로 바꾸어 부르는 것이나, ‘귀’를 ‘커’로 변환해 ‘커여워(귀여워)’라고 적는 것이죠. 사실 이러한 행위의 본질은 한글을 한 번 비틀어 장난치는 문자유희입니다. 수수께끼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지요. 물론 효율성이나 경제성, 문자의 전달 기능을 따진다면 별 효용가치는 없다 할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세종대왕이 이 사실을 알면 노발대발할 거라며 한글을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시는데요. 그렇지만 세종대왕의 성격과 업적을 생각해본다면 오히려 “한글을 가지고 재밌게들 노는구나”라며 좋아하실 것 같습니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할 당시는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든 서책은 한자가 적혀 있었습니다. 오직 한문을 공부해야만 대접받던 시절, 누구보다 혁신적인 생각을 갖고 전에 없던 새로운 문자 체계를 만들어낸 것이죠. 오늘은 우리가 정형화시킨 위인 세종대왕의 모습이 아닌, 몇몇 일화를 통해 살펴보는 인간적인 면모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세종대왕의 성격을 미루어 짐작할만한 일화를 소개해주세요.

    세종대왕의 성격이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은 최만리의 상소와 연관해 풀이해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최만리는 한글 창제에 반대 상소를 올렸던 집현전의 수장인데요. 그는 한글이 창제된 세종 25년(1443년)의 이듬해 2월 ‘갑자 상소’를 올립니다. 그 내용 중에는 오랜 기간 써온 한자 이외의 새로운 문자를 만든다는 것은 중대한 일인데 이러한 일을 논의과정 없이 비밀리에 진행한 것에 대한 비판이 등장합니다.

    지금으로서 생각해보면 백번 맞는 말일 것입니다. 물론 세종대왕도 이에 대해 알고 있었지요. 다만 그렇게 할 수 없었던 것은 신하들과 논의할 경우 한글 프로젝트는 출발부터 삐걱대고 훨씬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당시 이미 50대였던 세종대왕은 오랜 기간 신하들과 다양한 이유로 마찰을 빚어왔습니다. 가장 큰 것은 종교였지요.

    세종대왕에게 종교가 있는 줄 몰랐습니다.

    우리가 아는 조선은 유교 국가지만, 태조 이성계 이후 세종대까지도 왕실의 사람들은 독실한 불교 신자였습니다. 그래서 궁 안에 불당을 지어놓고 때마다 불경을 드리곤 했고요. 이를 은밀하게 진행하더라도 신하들이 모를 리가 없습니다. 때마다 들고 일어나 상소를 올리는 등 문제제기에 앞장섰습니다.

    물론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국교로 삼은 것이 조선의 국시이기도 했습니다만, 세종대왕도 종교에 있어서만은 도리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다툼이 생길 때면 빨리 마무리 짓고 나랏일에 지장이 없게 하겠다는 대답을 하며 신앙을 유지했으니까요. 오랜 기간 이어진 종교적인, 그리고 업무적인 충돌을 경험했던 세종대왕은 신하들의 극렬한 반대를 예상하고 한글 프로젝트를 비밀리에 추진했을 것입니다.

    광화문 ‘세종이야기’ 안의 세종대왕 어진 앞에서 포즈를 취한 박진호 교수

    그렇다면 한글을 창제한 것은 세종대왕의 노력이 절대적이었나요?

    그렇습니다. 사실 학계에서는 세종대왕이 거의 100% 혼자 힘으로 만들었다고 해석하고 있어요. 한글과 관련된 업적으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신숙주, 성삼문 등의 학자들은 당시 20대의 젊은 나이에 불과했습니다. 지금 시대에도 신입사원이 대표와 함께 일하진 않지요? 당시라면 더욱더 심했을 텐데 집현전 신하들이 한글 창제를 돕는 것은 무리였을 것입니다.

    다만 옆에서 기여했을 수도 있는 사람을 꼽으라면 세자, 안평대군, 수양대군 등 세 명의 왕자들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활용한 도서번역 사업 등을 추진할 때 신하들에게 이를 교육할 지휘와 감독을 왕자들에게 맡겼으니까요. 이는 세 왕자가 신하들보다 한글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한 사람의 아버지로서, 자녀들에게 자신이 만든 최대 걸작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을까요?

    세종대왕은 우리의 생각 이상으로 한글을 매우 아꼈던 것 같습니다.

    이제는 모두들 아는 이야기지만, 세종대왕은 젊어서부터 건강이 좋지 못했습니다. 눈병이 심해 시력이 안 좋았고, 피부가 좋지 않아 등에 종기가 난 적도 많았으며, 심한 소갈증(당뇨) 환자였지요. 이에 종종 충청도 초정리에 광천수로 유명한 온천을 찾아가 휴식을 취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왕의 행차에는 많은 인력과 비용이 들게 마련입니다.

    한 번은 세종대왕이 비용을 아끼고자 수행원을 대폭 줄이고 간소하게 다녀올 것을 공표했는데요. 그럼에도 한글 연구를 손에서 떼놓기 싫어 관련 서적들을 바리바리 싸서 들고 가려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걸 알게 된 최만리가 또다시 나서 말하길 “주상께서 요양하러 가시며 백성의 부담을 줄이고자 수행원조차 줄이는 마당인데, 한글 관련 책자를 가져가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라며 반대했지요. 따끔한 일침이었지만, 여러 병환에 시달리는 임금을 향한 애정이 담겨 있는 말이기도 했지요. 이렇듯 세종대왕은 아픈 몸을 이끌고 휴양길에 오르면서도 한글을 놓지 않고 끊임없는 고민과 연구를 거듭할 정도로 몹시 아꼈습니다.

    그렇다면 한글을 사용하면서 겪게 된 어려움은 없었나요?

    지금도 많은 분이 한글을 배우고 사용할 때 헷갈리는 것으로 받침 표기를 꼽습니다. 이는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는데요. 예를 들어 ‘숲’이란 글자를 적을 때 ‘숲이 우거졌다’란 문장을 읽을 때는 ‘ㅍ’이 제대로 발음됩니다. 그러나 ‘숲’이라고만 하면 받침은 ‘ㅂ’ 발음으로 변하지요. 이 받침을 어떻게 쓸 것이냐를 가지고 발음에 따라서 ‘ㅍ’ 혹은 ‘ㅂ’을 사용하자는 표면주의적인 표음(表音)의 원칙과 단어의 모양을 고정시켜 본래 소리대로 적자는 심층주의적 표의(表義)의 원칙이 대립했습니다.

    세종대왕은 이론적으로 철저하게 탐구하는 학자였기에 편의적인 조치보다는 의미를 중요시한 심층주의적인 입장이었고 단어의 모양을 고정하는 게 타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반면 수양대군과 신하들은 “주상전하의 입장이 옳지만, 백성들이 쉽게 글을 배워 사용하게 하자는 취지로 만들어진 문자인데 발음 나는 대로 적어야 익히기 편하지 않겠습니까”라며 반론을 펼쳤습니다. 세종대왕은 흔쾌히 자신의 입장을 포기하고 백성들이 쉽게 글을 배울 수 있는 길을 택했습니다. 그래서 한글 창제 초기의 문서들을 보면 받침의 표기가 지금과는 아주 달랐죠.

    받침의 문제 이후 혼동을 일으킨 경우는 없었나요?

    물론 있습니다. 세종대왕비 소헌왕후가 죽자 수양대군이 그녀의 명복을 빌고자 석가의 전기를 담은 불경언해서 ≪석보상절(釋譜詳節)≫ 엮어냈고, 세종 31년(1449년) 간행하기에 이릅니다. 세종대왕은 크게 감명받아 직접 지은 500여 수의 송시를 담은 한글 찬불가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세종대왕은 지금의 꽃을 뜻하는 ‘곶’과 같은 단어를 당시 표기법에 맞춰 ‘고지’라고 적지 않고 ‘곶이’라고 적었습니다.
    문제는 책을 인쇄하게 되면서 발생했습니다. 인쇄담당기구인 주자소의 관리들이 세종대왕의 원고를 표기법에 맞게 고쳐놓은 것이죠. 이후 인쇄된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에는 세종대왕이 정한 원칙에 따라 붓으로 고쳐놓은 흔적이 남게 됐습니다. 세종대왕은 자신의 원고를 수정한 것에 대해 용납하지 못했고, 당시의 인쇄비용을 고려할 때 책자를 폐기하는 것은 어려우니 한 획 한 획 정성스럽게 수정한 것입니다. 백성들을 위한 쉬운 규칙은 이해하지만, 자신이 지은 책에서만큼은 받아들일 수 없었던 학자로서의 고집이 돋보이는 부분입니다.

    교수님은 한 사람의 학자로서 세종대왕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광화문광장 세종대왕 동상 앞에서 포즈를 취한 박진호 교수 세종대왕은 누구보다 혁신적이고 창조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기존 전통의 질서를 파괴하더라도 백성의 편안함을 위해 한글을 선물했지요. 세종의 정신은 기존의 문화와 전통에 안주하지 말고 새로운 것을 과감하게 창조하고 시도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후세인 우리는 한글을 아끼고 사랑하는 한편 과감하게 발전시켜나가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최근 들어 세종대왕을 위대한 성군으로만 인식하지 않고, 한 명의 개인으로서 파헤치는 시도가 많은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한국 문화의 세계적 확산에 힘입어 한글문화를 세계에 전파할 수 있는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마음껏 자유롭게 한글을 사용하며 확산과 발전에 힘쓰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제 622돌 세종대왕 탄신일 기념 문화행사 ‘한글이 스승이다’

    국립한글박물관은 제622돌 세종대왕 탄신일을 기념하여 다양한 문화행사를 개최한다. 5월의 한글박물관에 방문하면 목판인쇄, 캘리그래피, 체험학습 뿐 아니라 가족관람객을 위한 특별해설도 진행된다.

    <주요행사 일정표>

    구분 행사내용 시간 장소
    체험행사 훈민정음 목판인쇄 체험
    훈민정음 언해본 서문과 용비어천가 2장을 목판으로 직접 인쇄해 보는 체험
    10:00~18:00 별관 2,3
    캘리그래피
    캘리그래피 전문가가 한글 손멋글씨를 직접 써주는 행사
    별관 2,3
    만지고 느끼는 즐거운 한글
    한글 꽃다발, 한글 왕관 등 교구재 제작과 함께 한글 체험 교육 진행
    강의실
    영화상영 칠곡 가시나들
    한글과 사랑에 빠진 칠곡 할머니들의 이야기 (전체관람가)
    10:30~12:10 (100분) 강당
    말모이
    우리말 사용이 금지된 일제강점기, 말과 마음을 모아 만든 사전 이야기
    (12세 관람가/ 보호자 동반시 12세 미만 관람 가능)
    14:30~16:45(135분)
    * 신청 : 2019.5.2.(목) ~ 5.13.(월) 누리집(홈페이지 www.hangeul.go.kr) 신청
    * 잔여석에 한해 당일 현장 접수 가능
    특별해설 세종대왕 탄신일을 맞아 훈민정음 창제 이외에도 다양한 업적을
    한글박물관 유물 이야기로 들어보는 특별해설
    10:00, 11:00, 14:00, 15:00, 16:00 2층 상설전시실
    중앙박물관 연계 외국어 해설 ‘한국의 문화유산 이야기’
    <해설사와 함께하는 두 개의 박물관 산책>
    15:00~16:30
    (사전신청필요)
    한글박물관, 중앙박물관
    ※ 행사 일정과 장소는 사정에 따라 변경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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