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3.제 91호 국립한글박물관 소식지 한박웃음

전체메뉴

소장품 이야기
《사민필지(士民必知)》

외국인이 저술한 국내 최초의
한글 세계 지리 교과서
『사민필지(士民必知)』

<사민필지>가 세상에 나온 19세기 말~20세기 초 전 세계는 요동치고 있었습니다. 당시는 산업 혁명이 미국, 독일, 러시아, 일본으로 확산되면서 산업 자본주의의 발달로 등장한 제국주의 열강이 막강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앞세워 전 세계 약소국을 지배하는 식민지 분할의 시대였습니다. 중국은 문호개방 이후 근대화 운동으로 격변의 시기를 지나고 있었고 이미 일본은 이보다 앞선 1868년 메이지 유신으로 본격적인 근대화의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동아시아의 작은 나라 조선도 1876년 일본과의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 조약을 체결을 시작으로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발간된 <사민필지>는 미국인 선교사 호머 헐버트(Homer B, Hulbert, 1863~1949) 박사가 저술한 순한글로 된 우리나라 최초의 세계 지리 교과서입니다.

미국에서 엘리트 교육을 받고 1886년 설립된 조선의 최초의 근대식 공립학교인 육영공원의 교사로 부임한 헐버트 박사가 조선 땅을 처음 밟았을 때 그는 23세 청년이었습니다. 조정의 관료, 양반들, 학생들을 만나면서 젊은 청년 헐버트 박사는 당시 조선의 상황에 대해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그리고 그는 왜 이 책의 출간을 결심하게 되었을까요?

책의 서문을 보면 저자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은 세상의 형편이 옛날과 크게 달라져 전에는 각국이 자기 나라를 지키고 자기 나라의 풍속만 따랐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아 세계 각국이 서로 조약을 맺고 마치 한집안처럼 사람과 물건과 풍속을 교류하는데 이러한 지금의 세상 형편은 앞으로도 바뀌지 않을 것이다.

각국이 전처럼 자기 나라의 언어와 역사만 공부한다면 세계 각국의 풍속을 알기 어렵고 알지 못하면 서로 교류할 때 부적절한 일이나 오해가 생겨 신뢰를 쌓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이전에 공부하던 학문 외에도 반드시 각 나라의 이름과 면적과 위치와 지형과 소산물과 정치와 국력과 재정과 군사와 풍속과 교육과 종교가 어떤지 알아야 할 것이다.

(중략)



조선의 한글이 중국의 한자에 비해 훨씬 편리하지만 사람들이 그런 줄을 알지 못하고 도리어 업신여기니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이런 이유로 필자가 비록 조선말과 한글에 익숙하지 않은 어리석은 외국인이지만 부끄러움을 잊고 특별히 한글로 세계 각국의 지리와 보고 들은 각국 풍속을 대강 기록하려고 한다.

총 1권, 161면(22.5×30.4cm)으로 된 이 책의 내용 구성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서(序) - 현재의 국제적 상황과 국제교섭의 필요성
- 지은이의 저작 의도
- 한글(조선 언문)의 우수성
본문 <덩이(지구)>
- 지구의 탄생과 기후, 인력, 일월식, 인종, 대륙과 해양 등에 대한 설명
- 5대양 6대주 개관
- 태양계의 구성원과 운동 원리
<6대륙 각각에 대한 총론 및 국가별 각론>
- 유럽, 아시아, 남아메리카, 북아메리카, 아프리카, 오스트레일리아
- 각 주에 소속된 국가의 지도상의 위치, 면적, 지방, 지형, 일기, 기후, 산수, 인구, 도시, 외국통상, 군사, 학업, 종교, 도로 등을 기재

아직도 조선에서는 한자를 더 많이 쓰던 시절에 외국인 저자가 우리의 문자 한글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며 순한글로 책을 집필하였다는 점도 놀랍지만 당시 격변하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조선인들도 이제는 세계 각국의 정세에 대해 알아야 한다는 뜻을 밝히며 대륙별(유럽, 아시아, 남아메리카, 북아메리카, 아프리카, 오스트레일리아 순) 주요 국가들 뿐 아니라 작은 나라들까지도 아우르며 각국의 풍속, 지리, 군사, 종교, 역사, 정치, 사회계층, 기후, 산물 등에 대해 매우 상세한 내용까지 세부적으로 기술하고 있는 점이 또한 매우 놀랍습니다. 뿐만 아니라 본문에서 세계 각국에 대해 설명하면서 조선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당시 조선인들에게 익숙한 단어나 표현을 사용하여 이 책을 접하는 독자를 배려한 점에서 조선인에 대한 저자의 깊은 애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사민필지 초판본 표지. 갈색의 낡은 표지 왼쪽에 세로쓰기로 사민필지라고 적혀 있다. ▲『ᄉᆞ민필지』(초판본) 표지 모습 사민필지의 서문. 빛바랜 종이 위에 오른쪽부터 한글로 빼곡하게 세로쓰기가 되어있다. ▲『ᄉᆞ민필지』 서문

대륙별 내용을 다루기 전 땅덩이(지구)를 다루는 부분에서는 태양을 중심으로 한 천체의 운동 원리와 지구의 구조, 그믐과 보름, 일식과 월식, 구름, 비, 바람, 천둥, 지진, 이술, 눈, 우박, 서리 등의 자연 현상, 은하수, 대륙과 바다, 인종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방대한 분량의 지식을 기술하면서 태양계 그림, 세계 전도, 대륙별 지도를 함께 수록하였습니다. 분명, 헐버트 박사는 당시 우물 안 개구리와 같이 한정된 시야를 갖고 있던 조선인들로 하여금 지구와 우주에 대한 과학적 지식과 세계 각국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습득할 수 있도록 하고 더 나아가 세계 여러 나라들의 사정을 둘러보면서 세계적인 안목과 확장된 시야를 갖게 되기를 희망했을 것입니다.

사민필지 속 지구 전도. 빛바랜 종이 위에 동그란 지구 지도 그림이 두 개 나란히 그려져 있다. 책의 오른쪽 한 면에는 세로쓰기로 글이 쓰여 있다. ▲ 지구를 동편과 서편으로 나눈 전도(全圖) 사민필지 속 유럽 지도. 빛바랜 노란 종이 위에 유럽 지도가 그려져 있다. 왼편 상단에 세로쓰기로 ‘유로바디도’라고 적혀 있다. ‘대셔양’, ‘아라사국’, ‘아시아’ 등이 한글로 적혀 있으며 대륙지도 위에 빨간색 선들이 그어져 있다.  ▲ 유럽 지도

사민필지 속 북아메리카 지도. 빛바랜 종이 위에 북아메리카 지도가 그려져 있다. 왼쪽 하단에 세로쓰기로 ‘북아메리까디도’라고 적혀 있다. ‘대셔양’, ‘태평양’, ‘가나다합즁국’ 등이 적혀 있다. 대륙지도 위로 노란색 선들이 그어져 있다. ▲ 북아메리카 지도 사민필지 속 남아메리카 지도. 빛바랜 종이 위에 남아메리카 지도가 그려져 있다. 왼쪽 하단에 세로쓰기로 ‘남아메리까디도’라고 적혀 있다. ‘대셔양’, ‘태평양’, ‘’ 등이 적혀 있다. 대륙지도 위로 빨간색 선들이 그어져 있다. ▲ 남아메리카 지도

<사민필지>는 당시의 지식인들에게 세계 각국에 대해 알리는 데 큰 도움을 준 것뿐만 아니라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외국인이 저술한 국내 최초의 순국문본 세계 지리 교과서로서, 그리고 당시 유길준의 서유견문(1895)보다 앞서 출간된 조선 개화기 첫 교과서로서 큰 의의를 가지며 개화기 한글 전용 서적으로 당시 19세기 국어 연구 자료로서도 가치가 높습니다.

1886년, 23세 청년으로 조선 땅을 밟았던 청년 헐버트 박사는 1949년 86살로 생을 마감하여 서울 마포 한강변의 양화진에 안장될 때까지 한국인보다 더 한국과 한국인을 사랑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교육자, 한글학자, 언어학자, 역사학자, 연론인, 선교사로 활동한 한국 문명화의 선구자이자 일본 제국주의의 부당함을 국제사회에 알린 독립 운동가였습니다.

국립한글박물관은 헐버트박사 건국 공로 훈장 수여 70주년을 맞이하여 <사민필지>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대중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 2020년에 <사민필지> 초판본의 원문과 읽기 쉬운 현대어역, 주석, 원문과 지도의 사진, 관련 분야 전문가들의 논고를 실은 소장자료총서 8 《사민필지》를 발간하였습니다.

인터넷을 통해 전 세계 도로망과 작은 가게까지 볼 수 있고 외국인들과 실시간으로 소통하는 현대를 살아가는 한국인들에게 <사민필지>의 내용은 격세지감일 수도 있겠지만 100여 년 전 외국인이 저술한 이 오래된 책은 읽는 이로 하여금 깊은 울림과 깨달음을 줍니다. 따뜻한 봄 햇살이 느껴지는 요즘, 서점가에는 신간 도서들이 넘쳐나고 있지만 근대 역사와 문화에 관심 있는 분들이라면 <사민필지>를 펼쳐보시는 건 어떨까요.

작성자: 연구교육과 김서영 학예연구사

상단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