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박웃음 2020.10. 제 8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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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저장소 평생을 바친 훈민정음 연구, 강신항 명예교수

‘기록’의 역사적 가치와 범주가 확장되면서 구술자료의 가치와 역할도 나날이 중요해지고 있다.
한글의 역사적인 시대를 함께한 다양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구술 기록으로 남기고,
다면적 구술 기록의 수집을 통해 사건을 총체적으로 보존하는 일은 국립한글박물관의 주요한 활동 중 하나이다.
국립한글박물관은 지난 2015년도부터 한글문화인물 구술기록사업을 통해 구술자료를 수집하고 있다.
한박웃음은 디지털한글박물관에 보관된 구술 아카이브 자료를 요약해 소개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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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신항
  • 성균관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
  • 이준환
  • 창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조교수
  • 1회차 2회차
  • 성균관 향관청 성균관대학교 박물관
  • 2016.10.06. 2016.11.25.
  • 01:40:00 01:45:00
  • 권갑주, 김주원, 남광우, 남기심, 방종현, 송철, 이기문, 이선근, 이숭녕, 이희승, 정양완, 정인보, 최필립, 한재영, 허웅, 홍기문, 홍명희, 레프 라파일로비치 콘체 비치(Лев Рафаилович Концевич), 히라야마(ひらやま)
  • 간송미술관, 계림유사(鷄林類事), 국어연구, 사성통해(四聲通解), 성리대전, 언문 지(諺文志), 정음발달사(正音發達史), 에티몰로지(Etymology), 조선관역어(朝鮮館 驛語, 한국어 연구, 훈몽자회(訓蒙字會), 훈민정음, 훈민정음 운해(訓民正音韻驛), 훈민정음 해례(訓民正音解例)

#01 대학 첫날 조회시간에 들려온 총포 소리

인터뷰에 응하는 강신항 교수. 체크무늬 셔츠를 입고 회색 바람막이를 입은 채 기와 담벼락 앞에 앉아 이야기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21명이 입학을 했는데 졸업을 할 때는 이기문 선생, 나, 이기문 선생 부인, 이렇게 세 사람이 한 거예요.”

강신항(1930년 출생) 명예교수는 충청남도 아산 출신으로 서울고등학교에서 남광우 선생을 만나
국어국문학과로의 진학을 결심하였고, 1949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하였다.
한국 전쟁이 벌어진 1950년에는 군무원으로서 전시의 역사를 편찬하는 전사편찬회에서 업무를 수행하였다.
“60년에 첫 강의를 시작한 게 6월 26일 월요일인데 그때는 대학에서 월요일 조회도 했었어.
그래서 6월 26일 날 9시에 조회를 하는데 의정부에서 포 소리가 들려왔어요.…
(중략)…그래서 우리는 21명이 입학을 했는데 졸업을 할 때는
이기문 선생, 나, 이기문 선생 부인, 이렇게 세 사람이 한 거예요.”

#02 순수한 모습에 반해 정양완 선생과 부부의 연을 맺다

강신항 교수가 체크무늬 셔츠를 입고 회색 바람막이를 입은 채 기와 담벼락 앞에 앉아 큰 웃음을 터뜨리며 하늘을 보고 있다.
“나는 중고등학교 때는 여학생을 본 일이 없었거든. 대학에 가니까 동급생 중에 여학생이 넷이 있더라고.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여자를 처음 본 거야.”

1951년부터 전시연합대학에서 수업을 받았으며 대학시절 사모님이신 정양완 선생님과
이른바 '7인방'(이기문, 김완진, 이승욱, 정연찬, 안병희, 강신항, 김열규)을 만나기도 하였다.
“나는 중고등학교 때는 여학생을 본 일이 없었거든. 대학에 가니까 동급생 중에 여학생이 넷이 있더라고.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여자를 처음 본 거야. 그런데 그중에 가장 (순수해 보이고)
히죽히죽 웃는 여자가 하나 있었는데 지금 그 사람이 우리 집에 와 있지만.
그 당시(1950년) 6.25 전만 하더라도 남학생이 여학생과 대화하면 남자들이 전부 비웃었어.
여학생이랑 무슨 이야기를 하냐며. 그러다가 여러 가지 우여곡절 끝에 잘 만났지.”

#03 10년에 걸쳐 번역한 신경준의 《훈민정음 운해》

체크무늬 셔츠를 입고 회색 바람막이를 입은 강신항 교수와 네이비 정장을 차려입은 면담자와 나무 테이블 앞의 의자에 앉아 대화하고 있다. 그들은 옛 기와 건물과 담벼락 앞의 잔디밭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자네가 (신경준의) 《훈민정음 운해》 좀 번역해 보라고 (하셔서) 57년부터 67년까지 10년 걸렸어. 그러다 보니까 자꾸 ‘경세’라는 말이 나와.”

강 명예교수는 1953년 석사 과정에 입학하여 56년에 이희승 선생의 ‘훈민정음 강독’을 수강하며
훈민정음 연구에 발을 들였다. 그 후 57년부터 67년까지 10년간 《훈민정음 운해》를 번역하고
63년부터 서울대에서 ‘훈민정음 해례 연구’ 강의를 하며 국내 훈민정음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이희승 선생께서 나보고 조선시대의 언어학자는 신경준과 유희밖에 없으니까
자네가 (신경준의) 《훈민정음 운해》 좀 번역해 보라고 (하셔서) 57년부터 67년까지 10년 걸렸어.…(중략)…
이희승 선생님도 그렇고 방종현 선생님도 운도, 운서(의 구별)을 아직 모르던 시대야.
그래서 자꾸 깊이 연구하게 됐는데 경세를 (연구)하다 보니까 《성리대전》(과 연관이 있는 것을 알았어).
그래서 60년 초부터 《성리대전》과 훈민정음과의 관계(를 연구했는데)
솔직히 고백을 하면 홍기문 선생님의 (《정음발달사》의) 영향이 컸지.”

#04 해외의 《훈민정음》 연구에 자극, 자료 집대성해 출판한 《훈민정음 연구》

회색 정장과 파란 셔츠를 입고 넥타이를 맨 강신항 교수가 이야기하고 있다. 
“《훈민정음》이라고 하는 (두툼한 책을) 세계에서 최초로 79년에 (낸 것을 알았지). 그 책을 보고 어찌나 화가 났던지. 부랴부랴 이듬해인 87년에 성대 출판부에서 《훈민정음 연구》를 처음 낸 거예요.”

이어 1959년에는 서울대에서 국어학 문학 석사를 취득하는 한편 덕성여대에서 강사 생활을 시작하였고 전임강사,
조교수를 거쳐 1964년부터 성균관대학교에서 교수직을 맡게 되었다. 1974년에 서울대학교에서
국어학 문학박사를 취득하였고 《훈몽자회》, 《성리대전》, 《계림유사》, 《조선관역어》 등을 연구하여
수많은 연구 업적을 남겼으며 1987년에는 대표적인 저서인 《훈민정음 연구》를 저술하였다.
“86년까지 그냥 강의만 하고 번역하며 준비하고 있다가 86년에 독일에 갔어.
23개국 나라의 학자들이 모여서 재구한국학회라고 하는 것을 (조직해서 해마다 발표를 하는데 이것을)
악세(AKSE, THe Association for Korean Studies in Europe)라고 해요.
거기서 러시아의 꼰체비치(레프 라파일로비치 콘체비치, Лев Рафаилович Концевич)라는
사람이 《훈민정음》이라고 하는 (두툼한 책을) 세계에서 최초로 79년에 (낸 것을 알았지).
그 책을 보고 어찌나 화가 났던지. 부랴부랴 이듬해인 87년에 성대 출판부에서 《훈민정음 연구》를 처음 낸 거예요.”

#05 일반 대중, 한자음을 불경 통해 배웠을 것.

회색 정장과 파란 셔츠를 입고 넥타이를 맨 강신항 교수와 면담자가 자리에 앉아 대화하고 있다. 면담자는 네이비 정장안에 파란 스웨터를 입고 있다. 
“역시 《훈몽자회》가 우리 한자음의 기초예요. 최세진이란 사람은 무서운 사람이야.”
“저 개인적으로는 《훈몽자회》가 16세기 전기의 자료지만.”

뿐만 아니라 한국어와 한자음의 음운사 분야를 섭렵하여 국내 음운사 연구에도 한 획을 그었다.
“…그러니까 머릿속에 늘 한자음 연구, 훈민정음 연구(가 있지). 일생동안 한자음을 통해서
우리 국어사를 (연구해보자는 마음으로) 해서 《훈몽자회(訓蒙字會)》를 분석도 해 보고 그랬어.
역시 《훈몽자회》가 우리 한자음의 기초예요.…(중략)…한자음은 자연스럽게 전승되는 것이 아니라 가르쳐야 하는 거야.
그런데 그 가르치는 주체가 누구냐 하면 불경이지. 남풍현 선생은 내 말을 오해해서
왜 (신라의) 설총의 이야기 같은 것은 뺐냐고 그러지만 (내가 이야기 하는 것은) 유교는 어디까지나 상류층의 교양이지.
일반 사람들한테 침투된 것은 불경의 한자음일 거예요. 절간에 가 봐. 행사를 한 번 하려면 네 시간씩
불경을 외우고 앉아 있어야 되니까 자연히 거기에서 그렇게 (한자음에 익숙해진다고 보는 거지).”

#06 한글 전용보다는 융통성 있게 국한문 혼용해야

회색 정장과 파란 셔츠를 입고 넥타이를 맨 강신항 교수가 이야기하고 있다. 
“어떤 자료, 옛날 자료, 문헌을 토대로 해서 연구한 바탕을 중심으로 해서 이야기를 하는 데 불구하고 상대방이 그걸 ‘아닙니다.’ 해서 다른 걸로 이렇게 할 때 아주 그냥 안 좋은 거지요.
”

강신항 명예교수는 현재 성균관대학교의 명예교수이자 난정학술상 운영위원회 위원장,
일석학술재단의 이사장으로 여전히 국어학계의 많은 부분에서 책임을 다하고 있다.
또, 목적에 따라 획일적이지 않고 융통성 있는 한글 전용과 국한문 혼용의 사용을 주장하였고
어문생활 에서의 관용과 오용에 대한 성찰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그리고 한자 문제는 8·15 광복 이후부터 두 흐름이 쭉 (흘러왔는데) 나는 처음부터 (주장해 왔어요).
60년대부터 대중잡지에서는 한자를 쓰지 말고 한글만 써 (달라고 해서 내가 거기에 맞추어 왔는데)
우리는 모든 것을 획일적으로 하려고 하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해요).…(중략)…
나는 전부 획일적으로 하려고 그러니까 (그러지 말자는 거지).
예를 들면 한국 명시 감상, 한시(漢詩) 감상도 한글로 전부 써 놓으면 어떻게 하냐는 말이야.”

#07 지엽적인 것에서 벗어나, 언어생활에 기여할 연구 이어가길

회색 정장과 파란 셔츠를 입고 넥타이를 맨 강신항 교수가 이야기하고 있다. 
“순경음 비읍(ㅸ)(이나 반치음(ㅿ) 연구 등 국어음운사 연구에 치중해 온 것 같아).
순경과 비읍과 반치음이 무슨 관계가 있어. 그런데 요새 젊은 학자들을 보면 전부 지엽적인 문제를 가지고 (파고들고 있는 것으로 보여). 전부 지엽적인 거야. 크게 보고 이야기를 해야 될 텐데.”

강 명예교수는 마지막으로 후학들에게 소신 있고 진실 된 연구자의 태도를 강조하였다.
“이게 고민은 고민인데, 이숭녕 선생님께서 학자는 현실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마라(고 강조하셨어).
우리가 소위 국어국문학계에서, 특히 국어학에서 현대 언어생활에 얼마나 기여를 했는가.
우리가 언어생활을 하는데 조금 더 바르게 나가는 길을 제시한 적이 (별로) 없잖아.
맨날 순경음 비읍(ㅸ)(이나 반치음(ㅿ) 연구 등 국어음운사 연구에 치중해 온 것 같아).
순경과 비읍과 반치음이 무슨 관계가 있어. 그런데 요새 젊은 학자들을 보면 전부 지엽적인 문제를
가지고 (파고들고 있는 것으로 보여). 전부 지엽적인 거야. 크게 보고 이야기를 해야 될 텐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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