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박웃음 2020.12. 제 8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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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은 처음이지? 한글로 감수성을 녹여낸 노랫말이야말로 한글문화! 제레미(필리핀)

필리핀 비간섬(City of Vigan)에서 자란 라울 제레미아 에벨리에나 주니어 2세는
강한 독립심을 품고 한국에 찾아왔다. 당시 그가 알고 있던 한국에 대한 것은
드라마 ‘발리에서 생긴 일’이 전부. 굳센 의지를 다지며 학원의 도움 없이 독학으로
한국어와 한글을 배운 제레미는 현재 한국의 한 게임회사에서 일하며 이용자들과 소통하고 있다.
외국어로 소통하는 직업을 가진 제레미가 생각하는 ‘한글문화’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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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에서 녹음을 배경으로 얼굴 가득 미소를 띤 채 서 있는 제레미. 회색 폴라티 위에 갈색 점퍼를 입고 있다.

반가워요, 한글박물관 소식지 ‘한박웃음’ 독자 여러분! 이야기에 들어가기에 앞서, 저는 한국에 국립한글박물관이 있다는 이야길 들었을 때 정말 깜짝 놀랐어요. 자국의 문자를 기념하는 박물관이 있다니…. 정말 대단하고 놀랍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외국인 대상 프로그램도 있다고 하니 코로나19가 잠잠해지면 꼭 찾아가보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스무 살이 되었을 때 부모님에게서 독립해 한 명의 성인으로서 올곧게 서고 싶었어요. 해외로 가야겠다고 판단했을 때 누나가 생활하는 싱가포르를 떠올렸지만, 그곳의 물가는 정말 비쌌어요. 그러던 중 어머니의 친구인 한국인 선교사님이 한국에 대해 소개해줬어요. 사실 한국에 큰 관심은 없었지만, 드라마 <발리에서 생긴 일>을 재밌게 봤었기에 흥미가 생겼죠. 그 때 선교사님이 한국 요리라며 ‘오므라이스’를 해주었는데, 전 이게 한국의 전통 음식인 줄 알았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재밌는 추억이죠.

한국에 도착한 뒤 천안의 한 대학 국제경영학부에 입학했고, 한글과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죠. 전 독학을 선택했고, 따로 학원을 다니지는 않았어요. 한글은 창제자인 세종대왕이 말씀하였듯 매우 빠르고 쉽게 배울 수 있었거든요. 다만 한국어의 단어 강세는 제게도 어렵게 느껴졌어요. 예를 들어 ‘치과’의 실제 발음은 ‘치꽈’인데 글로 쓰면 바뀌게 되니까요.

지금은 게임업계에 5년 정도 재직하고 있는데요. 국내 유명 게임의 이용자들을 살피고 운영하는 것이 주 업무이고, 누리 소통망 서비스(SNS), 게시판 등을 담당하고 있어요. 업무를 하며 특히 좋아하는 한국말은 ‘인지하다’에요. 회의나 업무시간에 잘 알아듣지 못했을 때, 동료가 “이거 알아들었니?” 혹은 “You got it?”이라 묻는 대신 “인지?”라고 장난스럽게 말해주거든요. 그럼 저도 “어~ 인지~”라고 대답하죠.

아참, 오늘은 한글문화에 대해 말씀드리려 해요. 제가 처음 한국행을 선택하는데 도움을 준 한국 드라마도 한글문화의 일부분일 것이고, 최근에는 수많은 문화콘텐츠가 한국에서 생산돼 한글을 담아 해외로 수출되고 있어요. 개인적으로는 ‘노래 가사’가 마음에 울림을 주는 한글문화라고 생각해요. 전 최신 K-pop보다 1980~90년대의 대중가요를 좋아하는데요. 특히 가수 김동률과 이소라의 노래를 좋아해요. 노래 안에 등장인물과 서사구조가 담겨있고, 제가 그것에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정말 좋아요. ‘그대안의 블루’, ‘사랑한다 말해도’ 등 좋아하는 노래가 많은데, 노래를 들으며 어려운 단어나 문장이 있으면 꼭 주위에 물어보았어요. 그렇게 한국어 실력도 많이 키울 수 있었고요. 저 또한 청춘의 이별을 겪어보았기에, 그 아픔과 그리움을 공감할 수 있도록 한글로 표현한 노랫말이 바로 한글문화라고 생각합니다.

짙은 녹음을 가로지르는 나무 다리 위에 서서 양팔으 벌린 채 포즈를 취하는 제레미. 반팔 셔츠에 반바지, 샌달을 신고 있다.


한국의 어떤 산 바위 위에 오른 제레미. 바위 뒤로 산의 풍경과 도심이 조그맣게 보인다. 흰 운동화에 검정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다.

마지막으로 유관순 열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필리핀도 한국도 모두 외세의 침략을 경험한 바 있죠. 가슴 아프게도 필리핀은 침략 때문에 본연의 문화가 많이 소실되었어요. 예를 들어 필리핀 원주민의 언어는 사라졌고, 공문이나 교과서에는 영어가 쓰이게 됐죠.

그런데 한국은 외세의 침략에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워 자국의 언어와 문자, 문화를 지켜냈어요.
이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에요.

얼마 전 유관순 열사를 주제로 한 영화 <항거:유관순 이야기>를 보며 큰 감동을 받았고, 감옥에서 함께 아리랑을 부르는 장면도 인상 깊게 보았습니다. 독자 여러분도 한글과 한국어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건 분들이 있단 점을 인지하고 소중히 여겨주었으면 좋겠어요. 물론 저 또한 소중히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