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9. 제62호국립한글박물관 소식지

한글 나누기 1

추석맞이 우리말 나들이
한가위, 송편, 저냐의 어원

글. 조항범 충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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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위

농경사회에서 음력 팔월은 수확과 풍요의 달이다. 음력 팔월에서도 그 중간인 15일이 기쁨과 넉넉함의 정점이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늘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이날(한가위)만 같기를 고대했던 것이다.

‘한가위’의 역사는 아주 깊다. ≪삼국사기(三國史記)≫(卷1, 新羅本記 1, 儒理尼師今)에 “왕이 육부(六部)를 정한 후 이를 두 패로 나누어 왕녀 두 사람이 각각 부내(部內)의 여자들을 거느리게 하여 편을 짜고, 7월 16일부터 날마다 육부의 마당에 모여 길쌈을 했는데 밤늦게야 일을 파하게 하고 8월 보름에 이르러 그 공의 많고 적음을 살펴 지는 편은 음식을 장만하여 이긴 편에 사례하고 모두 노래와 춤과 온갖 놀이를 하였으니 이를 ‘嘉俳(가배)’라 한다.”라 적혀 있는데, 이 기록 속의 ‘가배(嘉俳)’가 바로 ‘한가위’여서 그 역사는 적어도 신라시대로까지 소급해 올라간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나오는 ‘가배(嘉俳)’는 한자로 적혀 있지만 한자어가 아니라 당시의 우리말을 한자를 이용해서 적은 차자 표기이다. ‘가배(嘉俳)’는 신라어 ‘가배의신라어’ 또는 ‘가배의신라어2’를 적은 것으로 추정된다. ‘가배(嘉俳)’는 고려 가요 <동동(動動)>에서 다시 확인된다. 그런데 한글로 적힌 예는 정작 근대국어 문헌에서야 ‘가외’(역어유해(譯語類解) 上:4 (1690))로 보인다. ‘가외’는 ‘가배의신라어2’에서 ‘ㅂ의중세국어 > w’에 따라 나타난 어형이며, 이것이 변하여 ‘가위’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신라어 ‘가배의신라어’ 또는 ‘가배의신라어2’는 어떻게 만들어진 단어인가. 일찍이 양주동 선생은 ‘가배의신라어’를 동사 어간 ‘갑-’에 명사 파생 접미사 ‘-의의어형’가 결합된 어형으로 설명한 바 있다. 그리고 동사 어간 ‘갑-’을 ‘절반하다’, ‘이등분하다’의 뜻으로 보아 ‘가배의신라어’를 ‘반‧중(半‧中)을 만드는 것’으로 풀이하였다. ‘갑-’은 사라진 말이지만, 중세국어 ‘가운데의중세국어(가운데)’, ‘가옫(가웃, 절반 정도의 수량을 나타내는 말)’, 현존 지명 ‘갑곶, 갑골’ 등에서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다. 특히 ‘가운데의중세국어’를 ‘갑-+-(의의중세국어)ㄴ+데의어형’로 분석할 수 있다면 ‘갑-’에서 ‘반분(半分)’의 의미를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다. 접미사 ‘-의의어형’는 ‘깊이의어형(깊-+-의의어형)’, ‘높이의어형(높-+-의의어형)’ 등에서 보듯 명사 파생 접미사로 아주 활발히 쓰였다. 이렇게 보면 ‘가배의신라어’ 또는 ‘가배의신라어2’는 ‘한 달을 절반한 날’, 곧 ‘한 달 중 절반이 되는 날’ 정도로 해석된다. 곧 음력 15일(보름)을 가리킨다. ‘가위’에 이날이 특정한 날임을 분명히 보이기 위해 ‘날[日]’을 덧붙인 어형이 ‘가윗날’이다. 그런데 ‘가윗날’은 문헌에 잘 보이지 않는다. ‘가윗날’은 사전으로는 ≪조선어사전(朝鮮語辭典)≫(1938)에 ‘가위’와 함께 처음 올라 있다. 이 사전에서는 특이하게도 ‘가위’를 ‘한가위’의 준말로 설명하고 있다.

‘한가위’는 19세기 말의 ≪한영자전(韓英字典)≫(1897)에 처음 보이며, 이는 ‘가위’에 접두사 ‘한-[大]’이 결합된 어형이다. 이로써 ‘가위’를 ‘한가위’의 준말로 볼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가위’나 ‘가윗날’만 해도 8월 보름을 지시하기에 부족함이 없는데, 굳이 ‘한가위’라는 새로운 명칭을 만든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아마도 수확의 기쁨을 만끽하고, 풍요로움을 나누며, 조상의 은덕을 기리는 8월 보름날이 다른 달의 보름과 달리 특별히 중요하고 의미 있는 날로 인식되면서 ‘한-[大]’이라는 접두사를 첨가해 그날을 부각한 것이 아닌가 한다. ‘한가위’를 ‘한가윗날’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가위’를 ‘가윗날’이라 한 것과 동일한 관점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렇게 보면, 8월 보름날을 지시하는 고유어 명칭에는 ‘가위, 가윗날, 한가위, 한가윗날’의 네 단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가운데 가장 널리 쓰이는 것은 ‘한가위’이다. 올해도 풍성하고 넉넉한 ‘한가위’가 되기를 빈다.

 

송편

‘송편’은 추석에 빚어 먹는 명절 떡이다. 우리가 이 떡을 언제부터 먹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고려시대부터 대중적으로 만들어 먹었다는 설이 있다. 그런데 ‘송편’이라는 말은 18세기 문헌에 와서야 ‘숑편’(역어유해보(譯語類解補) 30 (1775))으로 보인다.

‘숑편’의 ‘숑’은 한자 ‘松(송)’인 것이 분명하다. ‘松(송)’의 당시 한자음이 ‘숑’이었으며, 무엇보다 떡을 찔 때 ‘솔잎’을 밑에 깔기 때문이다. ‘송병(松餠)’, ‘송엽병(松葉餠)’이라는 한자어, 그리고 ‘솔편’이라는 제주 방언은 ‘숑’이 ‘松(송)’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입증한다.

‘편’에 대해서는 설이 분분하다. 우선 ‘편’을 한자 ‘扁(편)’으로 보기도 한다. 이는 우리의 ‘송편’이 중국의 ‘편식(扁食, 만두처럼 빚어서 솔잎을 깔고 쪄서 만든 것)’과 흡사하다는 점에 근거한 것이나, 과연 우리 떡 이름을 중국 만두 이름에 기대어 만들었을까 하는 점에서 보면 큰 의심이 든다.

‘편’을 ‘떡’을 뜻하는 한자 ‘餠(병)’에서 온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는 한자어 ‘송병(松餠)’이 변하여 ‘송편’이 되었다는 것인데, ≪국한회어(國漢會語) 186≫(1895)에서 보듯 ‘송편’에 ‘松餠(송병)’, ‘月餠(월병)’이 대응되어 있어 ‘송편’과 ‘송병(松餠)’과의 관계는 분명하다. ‘송병(松餠)’이 아주 이른 시기부터 활발히 쓰였고, 또 ‘비졉(避接) > 피접’, ‘보(浦) > 포’, ‘불무 > 풀무’ 등에서 보듯 무기음이던 ‘ㅂ’이 유기음인 ‘ㅍ’으로 변한 예가 있으며, ‘도령님 > 도련님’, ‘빙쟈 > 빈쟈’ 등에서 보듯 종성에서 ‘ㅇ’이 ‘ㄴ’으로 변하는 예가 있어서 ‘송병’이 변하여 ‘송편’이 되었다는 설을 무시할 수는 없다.

또한 ‘편’을 한자 ‘䭏(편)’으로 보기도 한다. ≪한불자전(韓佛字典)≫(1880)의 ‘숑편’에 ‘松䭏(송편)’이 대응되어 있다. 그러나 ‘송편(松䭏)’이라는 한자어는 옛 문헌에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의 <동국토속자변증설(東國土俗字辨證說)>에서 ‘䭏(편)’을 들어 ‘餠(병)’과 같은 의미의 속자(俗字)임을 밝힌 것을 고려하면 이는 우리가 만든 한자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松䭏(송편)’은 나중에 한자로 부회한 것일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조선어사전(朝鮮語辭典)≫(1938)에서는 ‘편’에 아무런 어원 정보를 달지 않고 ‘떡’의 뜻으로 풀이하고, 제사 때나 어른에게 올릴 때 쓴다고 부연 설명하고 있다. ≪큰사전≫(1957)에서도 ‘편’에 아무런 어원 정보를 달지 않은 채 이를 ‘떡’의 비표준어로 처리하고 있으며, ≪국어대사전≫(1961)에서는 ‘편’을 표준어로 보되 ‘떡’을 점잖게 이르는 말로 풀이하고 있다. 이후 대부분의 사전은 ≪국어대사전≫(1961)의 기술을 따르고 있다. 사전의 풀이를 고려하면 ‘편’을 ‘떡’의 높임말 정도로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그렇다면 이는 고유어가 아니라 한자어일 가능성이 높다. ‘꿀떡’을 ‘꿀편’, ‘메떡’을 ‘메편’, ‘찰떡’을 ‘찰편’이라 하는 것에서 보듯 ‘편’이 ‘떡’의 뜻임은 분명하다.

≪조선어사전(朝鮮語辭典)≫(1938), ≪큰사전≫(1957)에서는 ‘송편’에 대해서도 아무런 어원 정보를 달지 않고 있다. 다만 ≪국어대사전≫(1961)에서는 ‘송편(松-)’으로 표시하여 ‘송’의 어원 정보만 밝히고 있다. 이후 대부분의 사전이 이러한 방식을 따르고 있어 ‘편’의 어원을 완전히 잃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송편’은 한자어 ‘松餠(송병)’에서 변한 것이거나 한자어 ‘松䭏(송편)’이거나 아니면 한자 ‘松(송)’과 고유어 ‘편’이 결합된 어형 중의 하나일 터인데, 세 번째 설은 거의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만약 ‘송편’의 ‘편’이 고유어가 아니라 한자어이고 또 어원을 잃은 ‘편’의 발음을 모사한 것이 ‘䭏(편)’이라면, ‘편’과 연결될 수 있는 것은 ‘餠(병)’뿐이어서 ‘松餠(송병)’ 설에 무게가 실리지 않나 한다.

 

저냐

추석과 같은 명절에 먹는 음식에는 기름진 것이 많다. ‘대구저냐’나 ‘고기전(--煎)’ 등과 같이 ‘저냐’나 ‘전(煎)’이라는 말이 들어간 음식이 대개 그러한 것이다. 사전을 찾아보면 ‘저냐’나 ‘전(煎)’을 포함하는 음식 이름이 의외로 많다.

사전에서는 ‘저냐’를 ‘얇게 저민 고기나 생선 따위에 밀가루를 바르고 달걀을 입혀 기름에 지진 음식’으로, ‘전(煎)’을 ‘생선이나 고기, 채소 따위를 얇게 썰거나 다져 양념을 한 뒤, 밀가루를 묻혀 기름에 지진 음식’으로 기술하여 약간 차이를 두고 있다. 이 정의에 따르면 ‘전(煎)’은 생선이나 고기뿐만 아니라 ‘채소’까지도 재료가 된다는 점에서 ‘저냐’와 다르고, ‘저냐’는 ‘달걀을 입힌다는 점’에서 ‘전(煎)’과 다르다. ‘파전’은 있어도 ‘파저냐’는 없고, ‘게전야, 닭저냐, 돈저냐, 복저냐, 양저냐’는 있어도 이들에 상응하는 ‘게전, 닭전, 돈전, 복전, 양전’이 없는 것을 보면 두 단어 사이에 미묘한 의미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저냐’와 ‘전(煎)’은 ‘간저냐’와 ‘간전(肝煎)’, ‘고기저냐’와 ‘고기전(--煎)’, ‘굴저냐’와 ‘굴전(-煎)’, ‘두부저냐’와 ‘두부전(--煎)’ 등에서 보듯 거의 같은 의미로 쓰이고 있다. ‘배추저냐’에서 보듯 채소를 재료로 그저 기름에 지진 것을 ‘전(煎)’이 아니라 ‘저냐’를 이용하여 표현하기도 하고, ‘동태전(--煎)’에서 보듯 ‘동태’를 재료로 하여 달걀을 입힌 것을 ‘저냐’가 아니라 ‘전(煎)’을 이용하여 표현하기도 한 것을 보면 ‘저냐’와 ‘전(煎)’의 의미 경계가 무너졌음을 실감할 수 있다. 또한 ‘돈저냐(동그랑땡)’에서 보듯 ‘저냐’ 앞에 ‘재료’가 아니라 ‘돈(엽전)’과 같은 ‘모양새’를 지시하는 단어가 오기도 하여 조어 방식도 달라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럼, ‘저냐’는 어디서 온 말인가. 아쉽게도 이에 대한 이른 시기의 예는 발견되지 않는다. 19세기 말의 ≪한불자전(韓佛字典) 546≫(1880)에 와서야 ‘전유어(煎油魚)’로 처음 보이는데, 이는 ‘생선 따위를 기름에 지짐질로 부친 부침개’를 가리킨다. 본래 ‘생선’을 재료로 하는 것만을 지시했음을 알 수 있다.

19세기 말의 ‘전유어’는 20세기 초의 ≪조선어사전(朝鮮語辭典)≫(1920), ≪조선어사전(朝鮮語辭典)≫(1938)에도 그대로 보인다. 특이하게도 후자의 사전에는 ‘전유어’와 함께 ‘전유어의축약어형’가 올라 있는데, 이를 주표제어로 삼고 있다. ‘전유어의축약어형’는 ‘전유어’의 제2음절과 제3음절의 모음이 양성모음으로 바뀐 ‘전요아’에서 축약된 어형이다. ‘전유어’에서 제3음절만 달라진 ‘전유아’(조선상식문답(朝鮮常識問答) 1946: 51)도 보인다. ‘전유어의축약어형’는 순행 동화에 의해 ‘전유어의순행동화어형’로 변하고, ‘전유어의순행동화어형’는 제2음절의 ‘ㅛ’가 탈락하여 ‘전야’(봄(이기영) 141 (1942))로 변한다. 한편 ‘전야’는 제2음절의 모음이 음성모음으로 바뀌어 ‘전여’(봄과따라지(김유정) 267 (1936))로 변하기도 한다.

≪큰사전≫(1957)에서는 ‘전유어(煎油魚)’, ‘저냐’와 더불어 ‘전유화(煎油花)’를 표준어로 삼고 있으며, 이 가운데 ‘저냐’를 주표제어로 정하고 있다. ‘전유화’는 부침개를 꽃 모양으로 만들 수 있어서 붙여진 이름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이 단어는 ‘전유어’와 마찬가지로 문헌에 잘 나타나지 않는다. ≪표준국어대사전≫(1999)에서는 ≪큰사전≫(1957)의 기술 방식을 그대로 따라 ‘저냐’를 주표제어로 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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