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9. 제62호국립한글박물관 소식지

한글 나누기 2

한글수난의 역사
연산군의 언문 탄압

글. 이동석 한국교원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한글의 탄생과 성장의 역사를 아는 것은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것과 같다. 인기 있는 드라마들은 대개 출생의 비밀을 포함하고 있는데, 한글의 탄생도 그러하다. 역사 기록으로 보면 한글은 세종이 직접 만든 문자이지만, 한글 창제의 구체적인 과정이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다 보니 여러 가지 추측들이 난무하기도 한다.

흔히 한글을 세종과 집현전 학자들의 공동 작품이라고 하는가 하면, 세종이 한글을 만들 때 다른 문자나 형상들을 참고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역사 기록을 통해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분명한 내용은 세종이 발음 기관의 모양을 본떠서 한글을 직접 만들었다는 것이다.

인기 있는 드라마에는 출생의 비밀과 같은 갈등이 항상 도사리고 있다. 갈등을 주인공의 입장에서는 위기라고 한다. 한글도 지금까지 성장해 오면서 여러 차례 위기를 맞았다. 태어날 때부터 최만리의 반대 상소를 통해 기득권층의 적극적인 반대에 부딪혔고,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어를 국어라 부르고 학교에서 조선어를 가르치지 못하는 위기 상황에 직면했다.

이러한 한글 수난의 역사 중에 연산군의 언문 탄압 사건이 있다. 연산군 10년(1504년) 7월 19일 연산군의 처남인 신수영(愼守英)이 비밀리에 계(啓)를 올렸다. 조선시대에 각종 의복, 비단, 염색, 직조 등의 일을 관장하던 벼슬인 제용감정(濟用監正) 이규(李逵)의 심부름이라며 새벽에 어떤 사람이 자신의 집에 익명의 투서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이에 이규에게 확인해 본 결과 편지를 보낸 일이 없다고 하자, 비상이 걸렸다. 즉시 도성의 문을 모두 닫고 사람이 빠져 나가지 못하도록 군사를 배치하였다.

 

연산군의 언문 탄압 사실을 기록한 ≪연산군일기≫

▲ 연산군의 언문 탄압 사실을 기록한 ≪연산군일기≫

 

투서의 내용은 개금(介今), 덕금(德今), 고온지(古溫知) 등의 의녀(醫女)가 왕을 비판하였으니 이들을 처벌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 의녀가 연산군을 비판한 내용이 투서에 그대로 실려 있어 사실상 연산군의 폭정을 비판하는 글로 받아들여졌다. 투서에는 왕이 신하들을 무자비하게 죽이는 것과 여색을 밝히는 것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담겨 있었다. ≪연산군일기≫에 수록된 폭로 내용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옛 임금은 난시(亂時)일지라도 이토록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는데 지금 우리 임금은 어떤 임금이기에 신하를 파리 머리를 끊듯이 죽이는가. 아아! 어느 때나 이를 분별할까?”

“옛 우리 임금은 의리에 어긋나는 일을 하지 않았는데, 지금 우리 임금은 여색(女色)에 구별하는 바가 없어 이제 또한 여기(女妓)·의녀(醫女)·현수(絃首)들을 모두 다 살펴서 후정(後庭)에 들이려 하니, 우리 같은 것도 모두 들어가게 되지 않을까? 국가가 하는 짓 또한 그른데 어찌 신하의 그름을 바로잡을 수 있을까. 아아! 우리 임금이 이렇듯 크게 무도(無道)하도다.”

 

그러나 이 편지는 언문으로 되어 있었고 글쓴이의 정체를 알 수 없었다. 이에 연산군은 7월 20일에 명령을 내려, 앞으로 언문을 가르치지도 말고 배우지도 말며 이미 배운 자는 쓰지 못하게 하고 언문을 아는 자를 한성의 오부(五部)로 하여금 적발하여 보고하게 하되 알고도 고발하지 않는 자는 이웃 사람에게 벌을 주도록 하였다. 또한 언문을 아는 것으로 적발된 사람은 필적을 대조하게 하였다.

7월 22일에는 언문을 사용하는 자는 참형에 처하고, 알고도 고발하지 않은 자는 곤장 100대에 처하도록 하였다. 또한 신하들의 집에 언문으로 구결(口訣)을 붙인 책이 있거든 모두 불사르되, 다만 한문을 언문으로 번역한 책은 금하지 말라고 하였다.

흔히 연산군이 언문으로 된 모든 책을 불사르도록 명령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연산군은 한문을 언문으로 번역한 언해서(諺解書)들은 그대로 두도록 하였다. 이러한 책들은 대개 선대(先代)의 왕들이 국가적인 사업으로 간행한 것들이었으므로, 연산군이 아무리 폭군이라 하더라도 이전 왕들의 업적까지 훼손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후 언문을 아는 사람들을 모아서 언문을 베끼게 하고 필적을 대조하는 작업을 8월 초까지 진행했으나, 결국 범인을 잡는 데에는 실패하였다. 연산군의 언문 탄압은 이렇게 막을 내리게 되었지만, 당시의 분위기는 매우 살벌했던 것으로 보인다. 언문으로 토를 단 책을 불사르게 하고 언문을 사용하는 사람을 참형에 처하게 한 것은 단순한 범인 색출을 넘어서 연산군의 언문에 대한 증오심이 얼마나 컸는지를 잘 보여 준다.

사실 이 사건에서 언문은 투서의 내용을 기록한 수단이었을 뿐 그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산군은 투서가 언문으로 기록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필요 이상의 조치를 취하는 난폭함을 드러냈다. 하지만 명분이 약했기 때문일까. 연산군의 언문 탄압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같은 해 12월 언문으로 역서(曆書)를 번역하게 하고 이듬해 9월에는 죽은 궁인(宮人)의 제문(祭文)을 언문(彦文)으로 번역하여 의녀(醫女)를 시켜 읽게 하는 등 필요에 따라 언문을 사용하도록 하였다. 이를 보면, 연산군이 언문 사용에 과민 반응을 보이고 매우 가혹한 조치를 취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근본적으로 언문 자체를 경시하거나 언문의 가치를 폄하했던 것은 아닌 듯하다.

자신에 대한 비판에 순간적으로 화를 참지 못하고 무자비하게 언문을 탄압했던 연산군이지만, 선대의 임금이 남긴 위대한 업적을 멸절할 의도는 없었던 듯하고 이를 강행할 명분은 더더욱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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