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박웃음 2020.8. 제 8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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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습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광복절을 맞이해 단재 신채호 선생의 숨결을 느끼다

광복절은 1945년 8월 15일에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광복한 날’을 기념하고
1948년 8월 15일에 임시정부 법통을 계승한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경축하는 날’이다.
해가 갈수록 뜻깊은 광복의 가치를 되새기고 순국선열의 희생정신을 기리는 국경일의 의미가 퇴색되어 아쉬움이 커지는 지금.
‘반갑습니다’ 이번 호에서는 겨레의 자유와 해방을 위해 삶을 바친 민족의 스승
단재 신채호 선생의 발자취를 찾아 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 윤석위 공동대표(부회장)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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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한박웃음> 독자 여러분께 인사와 ‘단재 신채호 선생’에 대한 간단한 소개 부탁드립니다.
윤석위 공동대표가 폭포수 아래에서 카메라를 보며 포즈를 취하고 있다. 보라색 모자를 눌러쓰고 안경을 꼈으며, 어깨에는 배낭을 메고 있다.
▲ 윤석위 공동대표 (부회장)

단재 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가 자리한 이곳 청주는 단재 선생님께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글공부를 하던 고향입니다. 청주의 낭성면 귀래리에는 선생의 묘소와 더불어 단재 기념관도 함께 있습니다.

대한매일신보의 첫 페이지. 우측쓰기로 ‘대한매일신보가’ 각각 한자와 한글로 적혀있다. 아래로 세로쓰기의 기사들이 주루룩 나열된다.▲ 대한매일신보

단재신채호 선생의 생가 풍경. 초가집 두 채 앞에 야트박한 돌담이 쌓여있고, 광장에는 신채호 선생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단재신채호선생 생가

선생의 호(號)는 단재(丹齋)인데요, 일편단심(一片丹心)에서 땄습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담겨있죠. 선생은 일제 강점기에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등에서 논설을 써서 민족의식을 고취시킨 언론인입니다. 1910년, 중국으로 망명하셔서 신문 <대양보(大洋報)>와 <권업신문>의 주필로 활동하시며 고구려 문화유적을 답사하셨습니다. 중국에서도 우리나라를 연구하여 쓴 역사서 <조선상고사>가 있습니다.

일제에 맞선 선생의 일화는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중 독립 활동을 하던 도중 수감됐던 뤼순감옥에서의 일을 들려드리겠습니다. 선생의 건강이 악화되자 형무소에서는 병보석 출감을 제안했습니다. 옛 친구이자 같은 집안의 친일인사를 보증인으로 하여 가출옥을 제의 한 것이죠. 그러나 친일파에게 몸을 내맡길 수 없다며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또한 생전에 ‘내가 만일 죽으면 시체가 왜놈 발끝에 채이지 않도록 화장하여 재를 바다에 뿌려 달라’는 말씀도 남기셨습니다.

Q. 단재 신채호 선생의 업적에 대해 말씀 부탁드립니다.
신채호 선생이 베이징에서 발행했던 <천고(天鼓)> 표지. 한글로 ‘텬고’라 적혀있으며, 그 아래로 한자와 영어로 책의 이름이 적혀있다. 두 권의 책 중 한 권은 금색, 한 권은 흰색이다.
▲ 신채호 선생이 베이징에서 발행했던 <천고(天鼓)>

단재 선생님은 조국을 위해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사용해서 독립을 위해 애쓴 분입니다. 22세 때, 성균관을 졸업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문동학원>과 <산동학당>을 세워 애국계몽운동에 앞장섰으며 신문사에 계실 때는 논설을 썼을 뿐만 아니라 가정교육과 여성계몽을 위한 <가뎡잡지>를 발행하기도 했지요. 민족의식을 높이기 위해 <이순신전>이나 <을지문덕전>을 쓰기도 했답니다.

중국에 있을 때는 박달학원을 세워 청년교육에 열정을 쏟았고 그들과 함께 광개토대왕, 장수왕의 발자취를 따라 답사를 다니기도 했습니다. 자라나는 청소년, 청년에 대한 마음이 특별했지요. 선생은 1921년 북경에서 중국에 조국의 현실을 알리기 위한 순 한문 잡지 <천고(天鼓)>를 창간하신 것을 기념하여 단재기념사업회에서는 내년, 천고(天鼓) 복간(復刊)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이렇듯이 단재 선생님은 일제에 대한 무장투쟁의 의지와 민족에 대한 강렬한 사랑이 많은 글에 나타나 있지요.

선생의 큰 업적 중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은 우리역사를 고조선을 포함한 5,000년 역사로 확대했으며 우리 민족이 활동했던 무대를 반도에서 대륙으로 확장시킨 것입니다. <조선상고사>에서 고조선과 고구려, 발해의 역사를 찾아내고 강조했지요. 그리고 고구려가 하얼빈에서 출발한 국가로 만주 등의 광대한 강역을 가졌던 민족임을 확인한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많은 소설과 시를 쓰신 문학인이기도 하지요. 나라를 잃은 설움과 고통을 글을 통해 많은 사람에게 알린 분이랍니다. 여러분도 기회가 된다면 단재 선생님의 작품을 꼭 한번 읽어보기를 추천합니다. 또한 의열단을 위한 ‘조선혁명선언문’을 쓰기도 했지요. 그 밖에 독립운동을 위한 단체를 만들기도 하셨습니다. 특히 단재 선생님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무장투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신 열혈 독립투사입니다.

Q. 단재 선생의 문학저술 활동 중 한글과 관련한 이야기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단재 선생은 1906년, 순 한글 잡지 <가뎡잡지>를 발행하셨습니다. 이것은 그 시대가 봉건적인 사회지만 여성들도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힘써야 한다는 주장과 ‘가정 미담’코너를 통해 자녀 교육이 국가의 운명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주시경 선생님도 함께 잡지 만드는 데 힘을 보태셨죠.

또한 『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草)』에서 이두문(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 우리말을 적던 표기법)명사해석법에 대해 쓰셨는데요. ①옛 우리말 가운데 넓고, 크며 긴 것을 “ᄋᆞ리”라고 불렀다는 사실을 찾아내어 북만주 하얼빈의 송화강, 요동의 요하, 압록강, 한반도의 대동강, 섬진강 등의 길고 큰 강의 이름을 “아리가람” 또는 욱리하로 불렸음을 고증했습니다. ②한강을 “아리수”라고 부른다는 것은 다 아시지요? 그리고 압록강 역시 “오리강”이라는 뜻으로 아리수를 말하고 있습니다. 단재 선생님은 현지를 답사하고 옛 책을 찾아보았으며 옛 책을 찾아본 결과 일본 역사서인 “일본서기”에서 낙동강이 “욱리하”로 불렸다는 것을 알아낸 우리말 학자였습니다.

Q. 기념사업회에서 진행 중인 사업에 대해 설명해주시길 바랍니다.

단재 신채호기념사업회의 다양한 활동 사진. 중국식 건물 앞에서 20여 명의 사람들이 단체사진을 촬영.

단재 신채호기념사업회의 다양한 활동 사진. 단재 신채호 선생 순국 83주기 추모식 현장. 50여 명의 인파가 좌석에 앉아있고, 무대 위로 신채호 선생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단재 신채호기념사업회의 다양한 활동 사진. 중국식 건물 앞에서 30여 명의 사람들이 단체사진을 촬영.

▲ 단재 신채호기념사업회의 다양한 활동 사진

사업회에서는 매년 전국 청소년 퀴즈, 글짓기 대회와 해외 단재유적답사로 중국에 다녀오는 행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 밖에 추모제와 탄신제, 그리고 해마다 학술제나 인문학 강의, 포럼 등을 열어 선양사업에 힘쓰고 있고, 선생의 생가와 기념관 방문하는 ‘청소년과 함께하는 단재유적답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중학생이 되면 꼭 행사에 참여해서 단재 선생님을 깊이 알아가는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단재 신채호기념사업회는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청소년과 일반인에게 단재 선생님을 알리는 선양사업에 힘쓸 것입니다. 그리고 시대에 맞는 컨텐츠를 갖추어 어린이, 청소년과 가까이 소통할 수 있는 통로를 만드는 일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어린이 여러분의 단재 선생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나라사랑의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