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2.제 90호 국립한글박물관 소식지 한박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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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습니다

“블록 작품 제작하며 한글의 가치를 재발견했죠”

블록 창작가 진형준 작가를 만나다

20대 중반, 백혈병 투병 중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 시작한 블록은
진형준 작가에게 외부와 소통하는 창구이자 병마와 싸워 이겨낸 치유의 상징이었으며
그를 ‘창작의 길’로 들어서게 한 문이 됐다.
자신만의 왕국을 차곡차곡 건설해 나가던 2015년의 어느 날,
우연한 기회에 한글 유물을 활용한 작품을 제작했고
그때부터 진형준 작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한글의 가치를 알리는 데 앞장서고 있다.

Q.<한박웃음> 독자 여러분께 인사와 작가님에 대한 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블록 창작가 ‘육포공장’ 진형준입니다. 성인이 되어 블록을 만진 것은 20대 중반, 백혈병으로 투병할 때였습니다. 치료를 받는 과정에서 세상과 소통할 창구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고, 지루한 시간을 보낼 무언가가 필요했습니다. 처음에는 종이접기를 하다 금세 싫증이 났는데 퍼뜩 어린 시절에 즐겁게 가지고 놀던 블록이 떠오르더군요. 그때부터 블록 커뮤니티에 가입해 제작 과정을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저는 경영학을 전공했고, 미술이나 예술 계통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이었어요. 하지만 블록은 그림을 그리거나 조각을 하는 일과 다르잖아요.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도 있고요. 또 블록은 정형화되어있는 상품이면서도, 어떻게 연구하고 조립하느냐에 따라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결과물이 나오기도 하거든요.

블록 창작가 진형준 작가의 블록 작품. 블록으로 만든 재봉틀. 검은색 몸체에 황금색 무늬가 들어가 있다. 바늘 부분은 상아빛 블록으로 제작됐다. 블록으로 만든 하늘색, 노란색, 빨간색의 실타래도 재봉틀 옆에 놓여 있다. 진형준 작가가 블록으로 만든 음식. 접시 위에는 블록으로 만든 팬케이크와 소스, 샐러드와 디저트가 놓여 있다. 숟가락, 나이프, 포크 두 쌍이 마주 보고 놓여 있다.

▲ 진형준 작가의 블록 작품들

이렇게 처음엔 블록 조립을 취미로 했는데, 차츰 그 매력에 빠져들었고 퇴원해서도 계속 창작활동을 하다 보니 운 좋게 작품을 찾아주시는 분들이 계셨어요. 그런 일들이 여러 차례 반복되면서 어느새 직업으로 삼게 되었습니다. ‘육포공장’이 뭐냐고 궁금해하는 분들이 많은데요. 유난히 육포를 좋아해서 커뮤니티 활동명으로 사용했던 건데 저와 이렇게 오래 함께할 줄 몰랐습니다.(웃음)

Q. 2015년에 블록으로 ‘훈민정음해례본’을 선보였는데요. 제작 계기와 작품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다면 말씀 부탁드립니다.

진형준 작가와 그의 블록 작품 <훈민정음해례본>. 블록으로 만들어진 훈민정음해례본이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다. 모자를 쓴 진형준 작가가 그 곁에서 해례본에 손을 올린 채 미소짓고 있다.

▲ 진형준 작가와 작품 <훈민정음해례본>

당시 훈민정음 상주본 소실에 관한 뉴스를 봤어요. 평소라면 지나쳤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때 마침 제가 블록으로 짧은 한글 단어나 문장을 만드는 데 관심을 갖고 있다 보니 그 뉴스에 귀를 기울이게 됐고, 일반 대중들에게도 알리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브릭 커뮤니티를 통해 함께 뜻을 모아 작업할 사람들을 모집했어요. 공동으로 제작한 작품을 한글과 관련이 있는 곳에 무상으로 기부하자는 큰 뜻을 가지고서 말이죠.

그 작품의 이름이 <훈민정음해례본>이에요. 훈민정음을 만든 이유와 한글의 사용법을 한문으로 적은 책이죠.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이 작품의 실제 모델은 원래 ‘훈민정음언해본’이에요. 훈민정음해례본을 한글로 풀이한 것이 바로 언해본인데, 당시 한글의 역사를 자세히 살피지 않은 채 의욕만 앞서서 실수를 했던 거죠. 뒤늦게 제목을 잘못 표기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반성의 의미로 바꾸지 않았어요.

일단 작품을 완성하긴 했는데 기증을 할 기관을 찾기가 쉽지 않았어요. 그러던 중 마치 운명처럼 정음문화연구원과 인연이 닿아서 그곳에 기증하게 되었죠. 정음문화연구원은 세종대왕이 태어나신 서촌에 자리하고 있는데요. 마치 작품이 스스로 들어갈 곳을 찾아간 기분이었습니다.

Q. 2019년에 <브릭으로 쓰는 독립선언서>를 제작했습니다. 작가님께 ‘한글’은 어떤 의미인지 궁금합니다.

진형준 작가의 블록 작품 <브릭으로 쓰는 독립선언서> 1조. ‘1조. 우리는 오늘 조선이 독립한 나라이며, 조선인이 이 나라의 주인임을 선언한다.’이 인쇄물로 출력돼 액자에 전시되어 있다. 인쇄물 오른쪽 하단에는 붉은색으로 진형준 작가의 인장이 찍혀있다. 진형준 작가의 블록 작품 <브릭으로 쓰는 독립선언서>의 전시 모습. 하얀색 벽에 독립선언서의 각 조항이 인쇄물로 출력돼 액자에 담겨 벽면 전체에 전시되어 있다. 액자들 사이에는 커다란 크기의 작품 제목 ‘브릭으로 쓰는 독립선언서’가 블록으로 제작되어 자리 잡고 있다. 제목은 붓글씨체 모양이며, 회색 바탕에 검은색 블록으로 제작되었다.

▲ <브릭으로 쓰는 독립선언서> 작품 모습

2019년은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의 100주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TV 뉴스로도 많이 방영됐고 SNS에서도 ‘필사 챌린지’ 등이 많은 관심을 받았는데, 4월쯤 되니까 분위기가 시들해지더라고요. 그래서 ‘블록 계에서 다시 한번 독립운동을 이슈로 만들어보자’ 하는 마음에 독립선언서의 첫 문장을 블록으로 만들어 커뮤니티에 올렸어요. 그런데 아무도 참여하지 않았고 저 혼자만의 작업이 되어버렸어요.

저는 하루에 한 조항씩, 지속적으로 독립선언서의 문장을 블록으로 만들었는데, 이 활동이 ‘3.1운동 및 임시정부 100주년 기념사업회’를 통해 ‘국민 참여 기념사업’으로 인정받기도 했어요. 다 합치니 약 850개가 되었고, 작업 시간은 876,000시간이더군요. 이 일을 계기로 독립 운동가분들과 그 후손분들에게 관심 커졌습니다. 이후 작품과 관련해 수익이 생기면, 수익의 일부를 감사하고 또 죄송한 마음으로 독립 관련 단체에 기부하고 있습니다.

한글은 한국인이 태어나면서부터 배우는 것이고, 의사소통을 할 때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인데도 가끔 그 소중함을 잊고 사는 것 같아요. 저 역시 그런 태도를 경계하기 위해 꾸준히 작품을 통해 한글의 가치를 되새기고, 다른 많은 분들에게도 선한 영향력을 선사하고 싶어요.

Q. 작품에 대한 영감을 받는 순간은 언제인지, 또한 창작 노하우가 있다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진형준 작가의 블록 작품 <나의 오랜 벗>. 갈색 등산화 한 짝과 블록으로 만든 등산화 한 짝이 나란히 놓여 있다.▲ <나의 오랜 벗>
 
진형준 작가의 작품 제작 모습. 작업 책상 위로 작고 투명한 서랍장이 빼곡하게 놓여 있다. 책상 위에도 블록을 담아놓은 통이 가득 올려져 있다. 짙은 녹색 모자를 쓴 진형준 작가가 책상 앞에서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그 곁엔 작업 과정을 촬영하는 카메라가 삼각대에 놓여 있다.▲ 진형준 작가의
작품 제작 모습

저는 제가 즐기는 작업을 해야 만족스러운 작품이 나오는 것 같아요. 즐긴다는 것은 그만큼 만드는 작품에 애정이 있다는 뜻이고 그 애정은 작품을 보는 분들에게도 확실히 전달된다고 생각하거든요. 많은 작업들이 제 일상에서 출발하고, 사물이나 장소에 대한 나만의 생각과 철학이 담겨있어요.

그 예로 <나의 오랜 벗>이라는 작품은 제가 신던 등산화를 모티브로 삼았어요. 퇴원하고 운동의 필요성을 느껴서 맨 처음으로 시작한 게 등산이거든요. 3년간 신고 여기저기 다니며 참 많은 추억을 쌓았죠. 그러다 보니 많이 낡고 해져버렸는데, 오래 간직하고 싶더라고요. 그 마음이 발현돼 작품을 제작하게 됐어요.

예전에는 작품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마음에 내가 좋아하는 장르의 작품이 아닌 대중적으로 사랑받는 장르의 작품을 시도한 적이 있었는데요. 어디 내놓기 부끄러울 정도의 결과물이 나오더라고요. 작품을 만들 때 내가 진심을 다하지 않으면, 작품도 진실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죠.

Q. 향후 한글 관련 활동, 혹은 작품 제작 계획이 있다면 말씀 부탁드립니다.

제가 취미로 블록을 만들다가 전업 작가로 들어서게 된 시점이, 앞에서 말씀드린 <훈민정음해례본> 작품 제작 시기거든요. 그래서 그런지 저에게 한글은 운명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또 제가 가공해서 보석으로 만들어야 할 원석처럼 보이기도 해요.

한글을 주제로 작업을 진행하면서 ‘한글 연구회’나 ‘한글 학회 발표회’에 참여할 기회가 많았는데요. 그곳에서 언어라는 것도 시대가 바뀌며 변화하는 것을 알게 됐어요. 요즘은 줄임말이나 신조어 등 한글 파괴에 대한 담론이 나오는데, 안타깝지만 그것을 막을 수는 없잖아요. 다만 우리 국민이 세종대왕께서 한글을 창제하셨을 때의 그 마음, 백성을 가엾게 여겨 글자를 선물한 그 마음을 기억했으면 해요.

저 역시 한글이 지닌 고유성과 가치에 자부심을 느끼면서 작업을 지속해 나갈 예정이에요. 저는 작업을 통해 재미를 느끼길 바라는 사람이기 때문에, 장기적인 계획을 선명하게 갖고 있지는 않아요. 앞으로도 하루하루 충실하게 살아가며 제가, 또 여러분이 즐거운 마음으로 감상하실 수 있는 작품들을 선보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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