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예능은 더 이상 웃음만을 추구하는 코미디가 아니다. 요즘 예능에서 말하는 재미란 희로애락, 일상의 공감 등의 정서적 충족과 이야기의 흡입력까지 포함한다. 과거 예능과 동의어로 여겨졌던 코미디는 이제 예능의 한 분야일 뿐이다. 오늘날 예능은 다양한 장르를 흡수하고 일상성과 기술의 발달을 바탕으로 성장해 가장 친숙하고 영향력이 큰 대중문화로 자리매김했다.
TV 프로그램 한글 자막이 열어준 ‘예능의 시대’
이러한 예능의 시대는 카메라가 방송국 스튜디오를 벗어나 길거리로, 우리의 일상으로, 그리고 집 안으로 향하면서 본격적으로 열렸다. 유려한 진행솜씨를 자랑하는 몇 명의 진행자와 끼 많은 출연자들이 웃음과 볼거리를 선사하던 쇼 버라이어티에서 캐릭터와 스토리를 기반으로 하는 리얼 버라이어티로 패러다임의 전환이 일어나면서 나타난 흐름이다. 한글자막은 이런 변화의 가능성을 열어준 예능 작법이었다. 리얼버라이어티의 전성기라 할 수 있는 2010년도를 전후로 예능 방송의 자막 남용 등의 문제를 지적하는 비판이 쏟아진 것도 이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TV 프로그램 한글 자막의 본디 목적은 출연자 이름이나 약력, 지명에 대한 설명, 코멘트 정리 등 정보적 가치가 있는 내용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것이다. 1990년대 초반까지 우리나라 예능에서 자막은 출연자의 이름을 알리는 정도로밖에 쓰이지 않았다. 그러다 1994년 당시 MBC의 ‘쌀집 아저씨’ 김영희 PD가 일본 후지TV에 연수를 다녀온 후 기획한 ‘양심 냉장고’에서 처음 도입했다고 알려져 있다. 방송 자막에 의성어, 의태어 등이 등장하는 일대 혁명이었고, 이듬해부터 예능 자막은 보편화됐다.
▲ 1994년 MBC <양심냉장고>에서 첫 도입된 예능 자막(사진 자료: MBC <일요일 일요일 밤에-이경규가 간다> 양심냉장고 화면 캡쳐)
그러나 당시에는 지금과 달리 활용도와 효과의 폭이 제한적이었다. <무한도전>이 캐릭터 쇼로 자리 잡기 전까지 우리나라 예능이 일본 예능의 영향을 받았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따라서 초창기 자막은 주로 감동과 웃음을 배가하기 위한 일본 예능의 만화적 화면 구성 방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로부터 꽤 오랜 시간이 지나 오늘날 예능 자막의 형태는, 대부분의 예능 역사가 그렇듯 <무한도전>을 통해 재정립됐다. 출연자들이 각자 캐릭터를 갖추고, 마치 드라마처럼 그 관계망에서 나타나는 스토리가 매주 진행된다. 장소도 방송국이 아닌 경우가 더 많다. 카메라 대수는 10배 이상 늘어났고, 3~4시간 녹화가 기본이던 촬영시간은 하루 꼬박, 혹은 1박 2일이 새로운 보편으로 자리 잡았다. 짜인 각본이 사라지면서 실시간, 실제라는 ‘리얼(Real)’의 가치가 강조됐다. 이른바 ‘리얼 버라이어티’의 도래다.
한글 자막 통해 시청자들과 소통, 유행어 만들어내기도
그러다보니 시청자와 프로그램 간의 동시대성이 중요해졌다. 지금 우리가 같은 땅에서 같은 시간을 살며 함께 호흡하고 있다는 ‘소통’과 ‘공감’의 정서는 리얼리티를 담보하는 공기와 같다. 방송 제작 과정은 점점 더 대중에게 공개되기 시작했다. 카메라 밖에 머물렀던 제작진은 카메라 안으로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한글 자막은 그들의 주요한 개입 경로였다. 출연진에 핀잔을 주며 시청자의 마음을 대변한다든가, 사회적 이슈나 유행어의 언급, 여론 피드백 등을 하는 자막을 통해 TV 프로그램과 시청자의 관계는 출연진, 시청자, 제작진이 함께 삼각달리기를 하는 한 팀 혹은 같은 정서를 공유하는 공동체적 성향을 띄게 됐다. 그러면서 ‘깨알 웃음’, ‘빅 재미’ 등등 어법에는 맞지 않은 신조어들이 다수 정착했다.
이런 한글 자막의 소통 기능은 향후, <라디오스타>와 <마이 리틀 텔레비전>에서 펼치는 인터넷 문화를 기반으로 하는 취향 공유로 이어졌다. 즉, 자막을 통해 제작진이 일종의 커밍아웃을 하며 특정 시청자들의 동류의식을 끌어내는 데 활용된 것이다. 이런 사례는 또 있다. 지난해 10월 말 국정농단 사태가 터지자 거의 모든 예능 프로그램이 자막을 통해 관련 이슈를 언급했다. 자막을 통한 동시다발적인 패러디는 유행어를 만들어냈다.
▲ 소통의 기능이 강조 된 예능 자막(사진 자료: MBC <라디오스타>, <마이 리틀 텔레비전> 화면캡쳐)
예능 자막에 대해 논할 때 스타 PD의 등장을 빼놓을 수 없다. 앞서 언급한 <무한도전>의 김태호 PD가 자막을 통해 예능에 일상성과 동시대성을 주입했다면, 소위 ‘나영석 사단’이라 일컬어지는 제작진은 의외의 캐릭터를 의외의 상황 속에 집어넣고 관찰한 뒤 편집을 통해 스토리텔링을 하는 새로운 예능 작법을 완성했다. 리얼 버라이어티보다 촬영시간은 훨씬 더 길어졌고, 미션이나 에피소드는 사라졌다. 제작진은 긴 촬영 분량을 어떻게 유기적으로 오려 붙이고, 무엇을 부각할지 선택해 에피소드와 스토리를 만들어야 하는 스토리텔러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자막은 이들에게 가장 효과적인 편집 기법이었다.
나영석 사단에게 자막이란 프로그램을 즐기는 사용설명서 혹은 가이드와 같다. 정선의 시골 마을에서 시작한 <삼시세끼>는 두 출연자의 일과만 좇지 않았다. 옥순봉의 아름다운 자연 풍광을 포착하고 동물들을 의인화하며, 잔잔하고 소소한 예능을 어떻게 즐기면 좋을지 ‘자막을 통해’ 알려줬다. <꽃보다> 시리즈에서는 “그들은 어떤 일이 있을지 그때까진 알지 못했다”는 자막을 플래시백 기법과 함께 활용하면서 여행 이야기에 극적 긴장감을 주조했다.
짧고 간결하면서도 함축된 자막은 한글의 힘
또한, 자막은 이야기의 가이드일 뿐 아니라 배경음악, 유려한 화면과 더불어 시청자들에게 감성을 전달하는 창구로도 쓰인다. 자극적이고 재기발랄한 톤을 벗어나 바람, 눈꽃, 햇빛을 화면에 담고, 시구나 노래가사 같은 서정성이 깃든 자막을 통해 정서적 만족감을 전달하는 데까지 자막은 발전했다.
이처럼 자막이 우리 생활 깊숙한 곳까지 파고든 데에는 ‘한글’ 자체가 갖는 우수성도 한몫 했다고 할 수 있다. 한글은 자막과 같이 짧은 글에 적합한 언어다. 영어의 경우 알파벳을 하나씩 가로로 길게 쓰기 때문에 늘어지는 반면, 한글은 자음과 모음, 초성과 중성, 종성을 모아서 쓰기 때문에 짧고 간결하면서도 함축된 자막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한글 자막을 빨리 읽을 수 있는 것 또한 그 때문이다.
이처럼 예능에서 스토리텔러의 브랜드와 역량이 점점 더 중요해지면서 자막의 지위와 영향력은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오늘날 예능에서 자막은 제작진과 시청자가 직접 소통하고 스토리를 전달하는 가장 확실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높아만 가는 자막의 중요성에 비해 자막의 질을 담보할 제작 환경에는 큰 발전이 없는 실정이다. 주로 최종 편집단계에서 자막이 입혀지다 보니 촉박한 일정 등의 이유로 교정교열은 물론 제대로 된 검수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관련 논란이 일어날 때마다 반복되는 불찰의 사유이기도 하다. 따라서 최소 수백만 명이 시청하는 영향력이 큰 콘텐츠인 만큼, 점점 높아지는 자막의 중요도만큼이나 한글의 품위를 지킬 수 있는 제도적인 장치 마련에 신경을 써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