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0. 제63호국립한글박물관 소식지

한글 나누기 2

한글의 시작
훈민정음에서 한글로

글. 김영욱 서울시립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세종의 꿈은 『용비어천가』에 서려 있다. 후왕에게 들려주는 말들이 실려 있는데 요약하자면, 천 년 전부터 덕을 쌓아 조상들이 조선을 개국했으니 왕손들은 조상들의 위대함을 받들고, 부지런히 노력하여 위대한 가업을 천년만년 이어나가자는 당부이다.

광화문의 세종대왕 동상 세종에게는 조선이 번창하여 천년왕국이 되려면 국가의 표준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있었다. 집현전은 고제를 바탕으로 새로운 문물제도를 연구하는 왕립연구소였다. 이와는 별도로 새로운 문자를 만드는 작업도 비밀리에 진행하였다. 이것은 소통의 표준을 세우고자 한 세종의 꿈이었다. 조선 문물제도의 표준이 대부분 세종조에 이뤄진 것도 이러한 꿈의 실천이었다.

‘정음(正音)’의 ‘정(正)’은 ‘바르다’는 뜻이지만 표준임을 함의한다. ‘훈민(訓民)’이란 ‘백성을 가르친다’는 뜻이다. 무력으로 왕권을 유지할 수야 있겠지만, 그것은 일시적이다. 백성들을 글로써 교화시켜야 할아버지가 세우고 아버지가 지켜낸 조선을 영구적으로 평화롭게 통치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무력으로 권력을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잔인하고 또한 힘든 일인지를 세종은 누구보다도 경험적으로 잘 알았다. 왕자의 난 때에 아버지 이방원의 무력이 상대편보다 약했더라면 세종은 아마도 어릴 적에 역적의 아들로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중세시대 때에 왕위계승 문제로 귀족 간의 전쟁이 일어나는 일은 세계사적으로 종종 있었던 일이었지만 그것이 조선에서는 흔하지 않았다. 이방원은 핏발 선 칼날로 그 자신은 물론, 자식들의 목숨을 지켜내었다. 무력으로든 지혜로든 권력을 유지해야 산다. 권력을 잃으면 죽음밖에 없는 것이 왕의 길이다.

세종은 성현들의 말씀 속에서 길을 찾았다. 책 속의 성현들 말씀을 이해하여, 신하와 백성들이 삼강오륜을 알고 실천하여, 지극한 풍속을 이루면 조선은 왕을 중심으로 평화롭게 살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훈민정음을 만든 다음, 제일 먼저 출판한 책이 『용비어천가』임은 우연이 아니다. 그 속에 세종의 염원, 운명, 삶의 목표가 담겼다.

6대조 할아버지까지 등장시켜 그들의 삶을 신격화하고, 후대의 왕들에게는 이러한 창업의 뜻을 새겨, 왕위를 남에게 빼앗기지 말고, 부지런히 힘을 길러 가업을 잘 이어나가라는 내용이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세종은 이러한 자신의 목표를 실천하기 위해 조선 통치의 표준을 세우는 데에 전념했다. 자신이 만든 문자를 ‘정음’이라고 한 것도 그런 의도의 반영이다.

그러나 신하들이 모두 세종의 뜻에 따른 것은 아니다. 실록에는 훈민정음과 관련된 기사들이 나오는데, 신하들은 왕이 만든 문자를 왕이 지은 이름이 아니라 ‘언문(諺文)’이라 불렀다. 신하된 도리로는 왕의 뜻에 따르는 것이 마땅하지만 최만리를 비롯한 쟁쟁한 선비들은 정음을 거부했다. 한자가 문자의 표준이지, 왕이 새로이 만든 소리글자가 표준일 리가 없다는 뜻이다. ‘언(諺)’은 옛날부터 전해지는 말, 속담 등을 뜻하는 것인데 여기에 ‘문(文)’을 붙여 ‘언문’이라 하였다. 왕의 문자가 표준이 되기를 거부하기는 했으나, 신하로서 왕의 업적을 비하할 수는 없었기에 그런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언문’이란 말 속에 왕의 문자를 비하하는 뜻은 없다. 전해오는 우리말을 기록하는 문자임에 틀림없으므로 ‘언문’이란 말, 그 자체는 정확한 표현이다. 다만 ‘정음’처럼 표준의 의미를 함의하지는 않았다. 당시의 지배계층들은 한자가 모든 문자의 표준으로 인식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인식이 450년 뒤에는 극적으로 바뀐다. 고종이 갑오개혁을 단행하면서 언문을 국문으로 격상시킨 일이다.

‘국문(國文)’이란, 말 그대로 ‘나라의 글자’다. 세종이 만든 언문이 조선의 표준이라는 뜻이다. 이에 따라 한문은 자연히 국문의 보조적 문자로 전락하였고 세종이 품었던 정음의 꿈은 450년이 지난 어느 날, 느닷없이 이루어진 셈이다. 고종의 국문 선언에는 최만리처럼 크게 반대하는 신하도 없었다. 서재필을 비롯한 유학파, 유길준을 비롯한 개화파, 주시경을 비롯한 국문학자들 모두가 대찬성이었다.

 

이런 점에서 역사는 아이러니하다. 문자 연구에 심혈을 기울이고 백성들에게 쉬운 문자를 보급하여 훈민에 온갖 노력을 다한 세종은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혀 표준의 꿈을 이루지 못했지만, 문자 연구와 거리가 먼 고종은 세종이 못 이룬 꿈을 거의 한순간에, 그것도 반대세력 없이, 유학파 · 개화파 · 국문학자 · 지식인층을 망라하고 심지어 그들의 열렬한 지지까지 받으면서 성공하였다.

국문은 법률이나 행정문서, 공공서비스 등 모든 공적 분야의 표준 문자임을 의미한다. 이것은 한자가 누리던 문자적 특권이 어느 날 갑자기 세종대왕께서 발명하신 왕의 문자로, 쿠페르니쿠스적 전환이 일어났음을 의미한다.

국문 선언 이후, 세종대왕의 위대함은 민족의 이름으로 드높아졌다. 국문이 한문보다 우위에 있다는 인식이 사회적으로 확산됨에 따라, 세종대왕께서는 요순 임금보다 더한 성군으로 민족사에 자리매김하였다. 국문 정리에 대한 민족적 열기 또한 뜨거워서 개화기 당시에 내로라하는 조선의 인재들은 다투어서 국문연구에 몸을 담았다.

이러한 문화적, 역사적, 민족적 자존심의 열기는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면서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 일제는 조선의 공문서를 일본 문자로 대신하였다. 다시 말해서 세종의 문자가 국문임을 부인하고 일본의 가나 문자를 국문의 위치에 강제로 올려놓은 것이다. 나라가 망하니 우리의 문자가 표준의 지위를 잃었다. 이에 애국자 주시경 선생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혼신을 다하여 일생 동안 국문연구에 매진하였는데, 훌륭하신 세종대왕께서 만드신 문자가 국문의 지위를 잃었으니 이를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하지만 선생님께서는 희망을 잃지 않으셨다. ‘국문’이란 용어를 쓸 수는 없었지만 언젠가는 조선의 문자가 표준의 지위를 회복할 것이라는 믿음을 잃지 않았다. 여기에 주시경 선생님께서는 위대한 문자라는 뜻의 ‘한글’이라는 이름을 짓는다. 그리하여 ‘국문’은 ‘한글’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다.

국립한글박물관의 상설전시실 이것이 한글의 시작이다. 한글은 ‘한(韓)’의 문자다. ‘한(韓)’은 ‘한민족’의 ‘한’이다. ‘한(韓)’은 크다, 위대하다는 뜻이다. 위대한 민족인 한민족이 한글로써 말글살이를 하여 그 위대함이 영원히 이어질 것이라는 주시경 선생님의 염원이 바로 이 한글이라는 이름 속에 새겨졌다. 선생님께서는 돌아가셨지만 그 위대한 정신은 이어져 이제는 한글이 다시금 국문의 지위를 회복하였다. 나라의 글자가 되었으며, 대한민국의 표준이 되어, 지금 이 순간에 대한민국 국민들과 함께 살아 숨 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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