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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박웃음 2019. 4. 제 69호 국립한글박물관 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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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장품 이야기 / 1749, 제주도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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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장품 이야기

    1749, 제주도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명칭 : 탐라별곡
    만든이 : 정언유(鄭彦儒, 1687~1764)
    시대 : 1749~1751년
    크기 : 20.9(세로)×31.5(세로)
    유물번호 : 국립한글박물관-한구659

    제주 관찰사가 살펴본 제주의 모습 ≪탐라순력도≫

    ≪탐라별곡≫은 조선후기 기행가사로 정언유(鄭彦儒, 1687~1764)가 제주목사(1749~1751)로 부임했을 때 자신의 순력 체험을 노랫말로 엮은 작품이다. 순력은 관찰사가 부임지를 공식적으로 순찰하던 제도로 정철의 ≪관동별곡≫도 자신의 부임지였던 관동 일대를 순력하면서 지은 작품이다. 조선시대 제주의 순력을 기록을 남긴 작품은 ≪탐라별곡≫외에도 병와 이형상이 남긴 ≪탐라순력도≫가 있다. ≪탐라순력도≫는 ≪탐라별곡≫보다 50년 앞서 창작된 작품으로 두 작품에는 제주를 바라보는 각기 다른 시선이 나타난다.

    ≪탐라순력도≫에는 제주 공간의 아름다운 풍광, 공간별 특징이 아주 상세히 나타나 있다. ≪탐라순력도≫ 속 <건포배은巾布背恩>에는 이형상이 제주 공간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선명히 드러나 있다. 건포배은이란 건포에서 임금의 은혜에 감사하여 절을 올린다는 뜻이다. 그런데 산 아래쪽을 보면 신당과 사찰이 불타고 있는 모습도 함께 그려져 있다. 이것은 이형상이 제주 목사로 부임하여 유교의 질서로 제주를 바꾸고 있는 자신의 업적을 그림 속에 남기려 했기 때문이다. 그는 신당 129곳을 불태웠고 사찰 5곳을 훼손시켰다. 또한 무당과 박수 285명을 강제로 농사에 종사시키는 등 제주의 토속신앙을 무섭게 척결했다. 이형상이 남긴 ≪남환박물≫에는 제주의 모계 중심적 혼인문화, 동성과 근족의 결혼에 대한 그의 강한 혐오감이 잘 나타나 있다. 당시 이형상의 이런 조치는 제주도민의 정서에 반하는 것이었으므로 백성 스스로 유교의 질서로 제주가 바뀐 것에 대한 감사의 절을 올렸다는 이형상의 설명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 <건포배은>에는 제주 문화에 대한 이형상의 강한 거부감과, 제주 백성을 유교 질서로 교화한 자신의 업적에 대한 자부심이 담겨 있는 것이다.

    목민관의 시선으로 바라본 제주 ≪탐라별곡≫

    산 아래쪽으로 사찰이 불타는 모습을 그린 그림 건포배은▲ 사찰이 불타는 모습을 그린 <건포배은>≪탐라별곡≫에는 ≪탐라순력도≫와 전혀 다른 목민관의 시선이 담겨 있다. 물론 조선시대 목민관의 체내에는 유학이라는 본질이 내재하고 있기 때문에, ≪탐라별곡≫ 속에도 ‘부모 형제 사랑’할 것을 강조하는 태도가 나타난다. 그런데 부모 형제를 사랑하라는 교훈은 유교적 교훈이면서도 인간의 보편적 가치와 연결됨으로 이형상과 같은 강도의 유학의 질서를 정언유가 강조했다고 보기 어렵다. 정언유의 순력이 이형상과 가장 다른 점은 제주의 아름다운 풍광을 즐기지 못하고, 제주 백성들의 눈높이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백성들의 생계를 걱정했다는 것이다.

    메마른 땅에 겨우 지은 농사는 악풍과 장마로 망치기 일쑤이며, 말과 소를 돌보는 와중에 해산물도 진상해야 하는 제주백성들의 신고한 삶의 모습이 상세하게 나타나 있다. 제주의 이런 척박한 현실은 이형상이 제주목사로 있었던 50년 전이나 정언유가 제주목사로 부임한 1749년이나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빈번한 자연재해, 과중한 부역 때문에 제주를 버리고 육지로 떠나는 백성들이 많아 조선시대에는 이를 법으로 강력히 금지했다. 그래서 ≪탐라별곡≫에서는 이렇게 오도 가도 못하는 백성의 처지를 두고 ‘언새’로 비유하기도 했다.

    어여쁘다 우리 백성 무슨 괴로움이 많아 / 의식이 궁색하여, 살맛이 나겠는가?
    사방팔방을 두루 돌아다녀 겨우 메마른 밭을 경작하니,
    잘린 호미 적은 쟁기 고생스럽게 가꾸어 / 오뉴월 있는 힘을 다하며,
    가을에 거두어 드리길 바랐더니 조물이 시기가 극심하여 날씨도 그릇되어,
    악풍과 심한 장마 해마다 몹시 지독하니 논과 밭을 돌아보면 병마로 짓밟은 듯 /
    곡식들을 둘러보면, 채찍으로 두드려놓은 듯 남은 이삭 주어내니 빈 껍질 뿐이로다 /
    무엇으로 공채갚고 어찌굴어 살아 갈고? 거리거리 굼주린 백성 가마잡고 일는 말이 /
    서러워라 우리 목숨 나라에 달렸으니 유민도 옮겨다가 임금이 계신 데 아뢰고져 <중략>
    모밀밥 상수리죽이 그 무슨 음식인고 <중략>
    소와 말을 먹이는 일가는 해산물 진상 구실에 더욱 서러우며 /
    배 부리는 무역 무리 곁꾼 그 안이 견디기 어려운가 <중략>
    슬프다 너의 가난과 고생 내 어이 모르리오

    정언유는 제주도를 ‘삼성신이 솟아난 후 민속이 순화한 곳, 일 년 농사일도 아주 잘 되고 가축도 번성하고, 집집이 귤 숲이요 곳곳이 준마로 가득 찬 곳,… 황금 같은 동정귤은 공사원에서 향내 진동하는 화평한 별천지’라 상상했다. 그러나 그가 목격한 현실은 이와 정반대였다. 백성들의 삶은 피폐했고, ‘군량미도 없는’ 제주의 현실은 암담하기만 했다. 그래서 작자 정언유는 공식적인 여행과도 같은 순력을 거의 즐기지 못한다. 또한 제주목사의 중요한 임무이기도 했던, 감귤과 공마를 진상하는 장면은 ≪탐라순력도≫에만 기록되어 있다.

    백성의 삶을 그들의 눈높이에서 살핀 목민관 정언유

    ≪탐라별곡≫의 작자 정언유가 자신의 순력 체험을 과도하게 삭제하고 백성들의 삶의 문제에 집중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제주를 중앙과 다른 이질적인 공간으로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백성의 눈높이에서 그들의 삶을 바라볼 수 있었으며, 백성들의 목소리를 직접 노랫말에 삽입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백성들을 위로할 때도 유교의 도리를 강조하지만, 이형상처럼 교화의 대상으로 새롭게 일깨우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도 이미 알고 있음을 전제하고 말했다.

    귤림에서 관리들과 기생들, 악공들과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가운데 풍치를 감상하는 그림 귤림풍악▲ ≪탐라순력도≫ 안의 <귤림풍악>

    애월진의 군사와 말을 점검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 애월조점▲ 군사와 열을 점검하는 모습을 그린 <애월조점>

    정언유가 작품 전면에 백성의 헐벗음을 부각한 것은 ‘이곳의 물정과 백성의 근심’이 임금께 전달되어 제주 백성을 위한 조치가 이루어지길 바랐기 때문이다. 극심한 자연 재해로 과중한 부역은 목민관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문제였다. 실제로 정언유가 제주 백성들의 처지를 중앙에 알려 구휼미 3천 석을 받기도 하였다. 이렇게 정언유가 백성의 후생이라는 시대가 처한 근본 문제에 집중할 수 있었던 것은 제주라는 공간을 육지와 동일한 공간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백성들을 미개하다고 여기지 않으며, 그들의 현실 문제를 관념적으로 대처하지 않았다. 이 작품은 백성의 문제를 곧 나의 문제로 여기며, 현실적인 대안을 모색한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고 하겠다.

    원고: 연구교육과 서주연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