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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박웃음 2019. 6. 제 71호 국립한글박물관 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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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기사 / 한국전쟁 때 ≪훈민정음≫ 해례본은 어디 있었을까? 전쟁의 참상에서도 목숨 걸고 지켜낸 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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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기사

    한국전쟁 때 ≪훈민정음≫ 해례본은 어디 있었을까?
    전쟁의 참상에서도 목숨 걸고 지켜낸 유물

    ‘1950년 한국전쟁으로 인해 부산광역시 광복동으로 임시 이전’
    백과사전에 적힌 국립박물관의 1950년은 단 한 줄로 축약된다. 그러나 이 모진 시기를 이겨내기 위해, 그리고 소중한 유물을 지켜내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이가 어디 한둘일까?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훈민정음≫ 해례본을 지켜낸 간송 전형필은 어떠한 마음이었을까? 70년 전 6월, 피난길에 오를 생각조차 하지 않고 우리 문화재를 지켜낸 사람들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찾아온 유물 납북의 위기

    1950년 6월 25일 새벽. 작전명 ‘폭풍’ 하에 남하한 북한군의 기세는 실로 놀라웠다. 소련제 전차 T-34를 앞세운 화력으로 개전 후 3일 만에 수도 서울이 함락 당했다. 전쟁의 아비규환 속에서 모두가 피난길에 올라 서울을 뜨기 바빴지만, 당시 국립박물관(현 국립중앙박물관)에 근무하던 대다수의 직원은 서울을 떠나지 않고 박물관을 지켰다. 김재원 관장은 은행에서 돈을 찾아 직원들에게 나눠주고, 진열품을 모두 창고에 격납도록 지시했다. 박물관 구내에도 인공기가 올라갈 즈음 나타난 북한 내각 직속 ‘조선 물질문화유물조사보존위원회’의 김용태는 국립박물관을 장악했다.

    광복 이후 일제가 수집했던 한국사와 조선왕실의 핵심 문화재들은 남한이 보유하고 있었기에 북한에는 문화재가 많지 않았다. 김용태는 박물관의 모든 권한을 넘기라며 압박했고, 겨눠진 총구의 위력 앞에 무력하게 도장을 찍을 수밖에 없었다.

    목숨을 건 유물납북 지연작전, 반드시 지켜낸다

    박물관을 접수한 김용태는 위험에 빠진 문화재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모든 유물을 포장하라 명령했다. 7월 말, 작업이 완료되었고 ‘제 1위’에 속하는 1,228점의 유물이 옮겨졌다. 당시 김 관장은 모든 유물을 서울 바깥으로 이동시키라는 김용태의 지시에 반대하며 유물을 덕수궁 미술관의 지하창고를 옮기자는 의견을 관철시킨다. 유물이 시외로 빠져나간 뒤에는 되찾아오기 어려울 것 같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이에 최순우, 장규서 등의 인물은 제 2, 3위급에 해당하는 유물 포장 지시에도 유물을 지켜내기 위해 목숨을 걸고 대담한 지연작전을 펼쳤다.

    이후 인천상륙작선의 성공으로 전황이 뒤바뀌면서 박물관 소장품을 모두 부산으로 피난시킨다. 휴전 이후 정부가 서울로 환도하며 국립박물관은 예장동 남산분관에 임시로 자리 잡았고, 덕수궁 석조전으로 옮겨진 뒤에도 모든 소장품이 서울로 귀환하기까지 10여년의 기간이 소요되었다.

    포장이 진행되면서 상자를 사 오라 하는 등 목수가 없다는 등으로 지연을 펴고 소전은 생다리에 붕대를 매고 출고를 늦추고 9.28 때까지 완전히 포장되어져 상자에 싸인 것은 하나도 없었죠… 북쪽 책임자 일관이란 사람이 9.28이 다가오자 우리 두 사람에게 책임을 묻겠다 할 때는 아찔했습니다. 그 날 그들이 모두 서울에서 사라져버렸습니다.

    - ≪간송 전형필≫ 중

    서양의 건축양식대로 지어진 덕수궁 석조전의 전경▲ 한국전쟁 초기 국립박물관의 유물을 옮긴 덕수궁 석조전
    이미지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서울시청 옛 건물을 배경으로 태극기를 게양하는 두 명의 한국군▲ 서울수복 후 태극기를 게양하는 모습
    이미지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훈민정음≫ 해례본과 간송 전형필, 그 피난의 역사

    한글의 원리와 문자 체계가 담긴 책, ≪훈민정음≫ 해례본을 지켜내는 과정도 쉽지 않았다. 해례본의 수난사는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익히 알려져 있듯 전형필은 일제강점기 우리 문화재가 나라 밖으로 빠져나가는 상황을 두고 볼 수 없어 전 재산을 쏟아 부어 문화재를 사들였다. 그리고 1938년에는 수집한 고려청자, 금동불상 등 한국을 대표하는 유물을 정리·연구하기 위해 보화각(葆華閣, 현재의 간송미술관)을 세운다.

    당시 ≪훈민정음≫ 해례본은 발견되지 않고 있었는데, 그는 1943년 6월 운명과도 같이 해례본을 판매한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불과 1년 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한글학자들이 모두 잡혀 들어갔던 상황에서 이 소식이 조선총독부에 들어간다면 조선의 가장 소중한 문화재를 빼앗길 것이 불 보듯 뻔했다. 그는 서둘러 책 주인이 부른 1천 원의 열 배에 해당하는 1만 원을 지불하고 해례본을 구입한다.

    “훈민정음 같은 보물은 적어도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며 내민 1만 원은 당시 기와집 열 채에 달하는 금액이었다. 간송은 어렵게 구한 해례본을 세상에 공개하지 않았고 1945년 광복 이후에야 이 사실을 알렸다. 그러나 ≪훈민정음≫ 해례본의 위기는 끝나지 않았다. 국립박물관을 점령한 북한군이 보화각에도 들이닥친 것이다,

    훈민정음 해례본의 양면을 펼친 페이지▲ ≪훈민정음≫ 해례본
    이미지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자리에 앉아 카메라를 바라보는 간송 전형필의 생전 흑백 사진▲ 간송 전형필
    이미지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문화의 소산 지켜낸 업적 기억돼야

    보화각이 보유한 유물에 놀란 북한군은 국립박물관의 유물과 함께 북한으로 옮겨갈 계획을 세운다. 전형필은 이를 두고 피난할 수 없어 보화각 부근의 빈집에 몸을 숨겼다. 촌각을 다투는 피난길에도 ≪훈민정음≫ 해례본만은 오동나무 상자에 넣어 몸에서 떼어놓질 않았다. 간송은 피난 기간 동안 혹여 잃어버릴까 걱정해 낮에는 품고 다니고 밤에는 상자를 베개 삼아 잠을 청했다고 전해진다.

    한 순간도 떨어지지 않았던 그의 정성이 하늘을 감동케 했을까? 보화각과 국립박물관에서 진행된 유물포장 지연작전 덕에 보화각의 유물과 ≪훈민정음≫ 해례본을 지켜낼 수 있었다. 1962년 ≪훈민정음≫ 해례본은 국보 제70호로 지정됐고, 1997년에는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돼 세계인이 지켜나가야 할 주요 문화재로 이름을 올리게 된다. 3년 1개월간 이어진 전쟁 속에서도 자신의 안위보다 선조들이 만들어놓은 문화의 소산을 지켜내는 데 목숨을 바친 사람들이 있었기에 수많은 유물들이 현재까지 전해져 우리의 문화를 빛내고 있다.

    <참고 자료>
    김성북, <혜곡 최순우와 최순우 옛집 이야기>, 2017.8.7.
    전성우, ≪간송 전형필≫, 1996.
    장상훈, 박물관신문, <1950년 6.25 전쟁의 발발과 국립박물관>, 2019.3.
    김재원, ≪경복궁 야화≫, 탐구당, 2013.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