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0.제 98호 국립한글박물관 소식지 한박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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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환 박사가 손에 종이를 든 채 환하게 미소짓고 있다. 그는 밝은 회색빛 자켓과 검은색 티셔츠를 입고 있다. 종이에는 ‘한글이 희망’ 문구와 정재환 박사의 사인이 적혀있다. 배경에는 옅은 황토빛 배경에 한글 자음들이 적혀있다. 정재환 박사 오른쪽에 한글 자음과 모음이 뒤죽박죽 가득 찬 말풍선이 그려져 있다.

기획 기사②

우리말글 사랑 실천의 길 : 불가사의한 언어생활
글 정재환(한글문화연대 공동대표, 문학박사)

“어떻게 한글운동을 하게 되셨어요?”

1979년 방송 데뷔 10년 만에 청춘행진곡 진행자로 스타가 되었고, 그 후로는 텔레비전과 라디오에서 많은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방송에 3개월만 안 나와도 잊힌다는 말처럼 몰라보는 분들도 많지만, 청춘행진곡, 코미디전망대, 퍼즐특급열차, 깊은 밤 짧은 얘기 등은 지금도 기억하는 분들이 적지 않다. 이런 경력이 있기 때문일까. 한글문화연대 공동대표가 된 나의 모습을 보면 ‘한글 운동의 길’로 들어선 이유에 대해 묻는 일은 일상다반사처럼 일어난다.

1995년 음악방송 진행을 할 때, 솔리드의 ‘이 밤의 끝을 잡고’를 이틀이 멀다 하고 소개했는데, 어느 날 방송이 끝나니, 피디가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냈다.

“시청자가 전화를 했는데, 진행자가 연음법칙도 모르고 무슨 진행을 하느냐?
‘이 밤의 [끄츨] 잡고’가 아니고 ‘이 밤의 [끄틀] 잡고’라고 발음해야 한다고 전해달라더군요.”

그 순간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멍했다. ‘연음법칙! 초등학교 때 배운 건데, 왜 까맣게 잊고 살았을까? 그분의 지적대로 방송진행자는 우리말 발음도 정확해야 한다.’ 그 후 [끄틀 끄틀 끄틀]을 수도 없이 연습했다. 이오덕 선생님의 『우리말 바로 쓰기』, 김상준 아나운서의 『방송언어연구』, 이계진 아나운서의 『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딸꾹』, 강재형 아나운서의 『애무하는 아나운서』, 이익섭 교수님의 『국어사랑은 나라사랑』 등등 우리말에 관한 책도 열심히 찾아 읽었다.

하트가 그려진 분홍빛 배경에 세종대왕과 아이들이 그려져 있다. 익선관을 쓰고 붉은색 곤룡포를 착용한 세종대왕은 가운데에서 두 손으로 하트를 만들고 있다. 그의 양옆에 선 여자아이와 남자아이는 각각 두 손을 들어 작은 손가락 하트를 만들고 있다. 여자아이는 흰색 티셔츠를, 남자아이는 짙은 녹색 티셔츠를 착용했다.

사랑은 ‘하는’ 게 아니고, ‘빠지는’ 거라는 말처럼, 나도 모르게 한글 사랑에 빠졌다.

문법, 맞춤법 등은 어려웠지만, 한국어와 한글의 중요한 가치와 소중함을 깨달았다. ‘말은 사람의 정신의 표현이요, 겨레말은 그 겨레 의식, 겨레 정신의 표현’이라는 최현배 선생님의 말씀이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메아리쳤다. 말로 밥 먹고 사는 방송종사자로서 최소한 밥값은 하자! 우리말글을 정확히 쓰자! 일본말을 쓰지 말자! 맞춤법도 지키고 발음도 정확히 하자! 되도록 쉬운 말 고운 말을 쓰자! 1999년에 방송 언어에 관한 책을 냈고, 시민단체에서 진행자에게 주는 ‘좋은 언어상’을 받는 기쁨도 누렸다.

우리말글 사랑은 여러 일을 포함하지만, 정확하게 쓰는 것도 중요하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상야릇한 현상’을 불가사의라 하는데, 그동안 목격한 바에 따르면 한국인의 언어생활은 참으로 불가사의하다.

“어머, 쌍둥이인데 얼굴이 틀리네요!”

“얼굴이 틀린 게 아니고 다른 겁니다. 틀렸다는 건 뭔가 잘못됐다는 거지요.
그렇게 말씀하시면 애들 엄마가 얼마가 마음이 아플까요?”

정작 벌컥 화를 내야 마땅할 애들 엄마는 ‘맞아요, 이란성이라서 얼굴이 틀려요!’라고 맞장구치기 일쑤다. 지난 30여 년 동안 이에 대한 설명을 수도 없이 봤다.

‘다르다’는 ‘같다’의 반대말이에요. 비교가 되는 두 대상이 ‘같지 않다’라는 뜻이지요.
그리고 ‘틀리다’는 ‘맞다’ 혹은 ‘옳다’의 반대말로, 셈이나 사실이 옳지 않거나 어긋난다는 뜻이에요.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어린이백과)

머리를 쥐어짜고 혀를 비틀고 입술을 뒤집어야 하는 것도 아닌데, ‘다르다’와 ‘틀리다’를 구분하는 사람이 드물다. 머리로는 이해해도 입으로 전달이 되지 않는 것이라면 신경계의 질병을 의심해야 할까? 반면에 미국이나 영국 사람들이 different(다르다)와 wrong(틀리다)을 바꿔 쓰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한국인들은 불공정, 불법, 불의, 내로남불 등에 분노하지만, 날마다 쓰는 우리말에는 무관심하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분 중에도 ‘뭣이 중한디? 좀 틀릴 수도 있지. 말만 통하면 되잖아!’라고 생각하는 분도 있을 텐데, 우리말에 대한 이런 태도는 참으로 불가사의하다.

외국어를 공부할 때는 철자 하나에도 신경 쓰고, 문법 틀리면 안 되고, 발음까지 원어민처럼 하려고 기를 쓴다. 단어 암기하고, 문법책 달달 외우고, 발음 때문에 설소대를 잘라내는 수술도 했다. 이런 정성(?)과 열정과 노력의 십 분의 일, 아니 백 분의 일만이라도 우리말글에 쏟으면 어떨까?

주황빛 배경 가운데에서 익선관과 붉은색 곤룡포를 착용한 세종대왕이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다. 세종대왕의 머리 주변으로 물음표가 띄워져 있다. 그의 양옆에 선 여자아이와 남자아이는 각자 핸드폰을 들고 핸드폰에 집중하고 있다. 여자아이는 보라색 점퍼를, 남자아이는 옥색 티셔츠를 착용했다.

한글날이 되면 ‘한글 사랑해요, 세종대왕 고마워요!’라고 말하지만, 일상에서는 인싸, 아싸, 펜데믹, 드라이브쓰루, 쉘터, 니즈, 워딩 같은 알쏭달쏭한 말들이 난무한다. ‘가오를 잡GO’, ‘남 일에 겐세이를 놓GO’, 휘발유를 이빠이 넣는 등 일제 잔재어도 여전하다. 최현배 선생님은 일찍이 『우리말 존중의 근본뜻』(1951년)에서 ‘국어 운동의 목표 5가지’를 말씀하셨다.

“깨끗하게 하기 - 쉽게 하기 - 바르게 하기 - 풍부하게 하기 - 널리 퍼지게 하기”

당시 ‘깨끗하게’는 우리말에서 왜색을 걷어내고, 외래어를 남용하지 말자는 거였다. ‘쉽게’는 쉬운 말로 소통을 매끄럽게 하자는 거고, ‘바르게’는 정확히 쓰자는 것이다. ‘풍부하게’는 우리말을 갈고 닦고 어휘를 늘려 많은 것을 표현할 수 있게 하자는 것이며, ‘널리 퍼지게’는 우리말글을 두루 써서 나라 안에 글자 모르는 사람이 없게 하고, 세계에 널리 퍼뜨리자는 거였다.

내가 중학생이던 시절, 팝송에 빠졌었다. 비틀즈의 어제(Yesterday), 아바의 춤추는 여왕(Dancing Queen), 존 덴버의 고향으로 나를 데려다 줘(Take me home country road) 같은 노래를 뜻도 모르고 들었고, 세계인들이 한국 노래, 한국 드라마에 열광하는 날이 오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런데 한류는 세계가 함께 즐기는 문화가 되었고, 많은 이들이 한국어를 배우고 있으니, ‘널리 퍼지게’의 꿈은 시나브로 이루어지고 있다.

어두컴컴한 무대 위에서 정재환 박사가 의자에 앉아 강연을 펼치고 있다. 그는 검은색 중절모를 눌러쓰고 짙은 회색빛의 자켓과 검은색 목폴라 티셔츠를 입고 있다. 그는 마이크를 든 채 무언가 말하고 있다. 그의 뒤로는 짙은 어둠과 함께 회색빛 시멘트벽이 보인다.

외국인들이 묻는다. ‘키가 적어요.’가 맞아요, ‘작아요’가 맞아요? 한글은 글자 그대로 소리를 내면 된다고 하던데, 왜 ‘신라호텔’을 ‘실라호텔’이라고 하는 거죠? 연음법칙에 따르면, ‘달기 운다’라고 해야 한다는데, 왜 한국인들은 ‘다기 운다’고 하는 거죠? 한국인들은 왜 그렇게 영어를 많이 쓰나요? slim(슬림)이나 healing(힐링)에 해당하는 한국어는 없나요?

꼬리를 무는 질문에 답하고, 지적받지(?) 않으려면 우리말글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다르다와 틀리다’조차 잘못 쓰는 불가사의한 언어생활을 청산하고, 패닉바잉·컷오프·비전 대신 공황구매·탈락·전망 등을 쓰자. 오히려 우리말이 어색하다는 사람도 많지만, 1980년대 중반, 서클에 익숙한 청년들에게 동아리는 어색하고 촌스러웠다. 하지만 서클은 자취를 감췄다. 드문 사례이지만, 동아리는 우리말글 사랑 실천의 길을 제시했고, 안전문(스크린도어), 임시정차구역(키스앤라이드) 등이 힘겹게 희망의 빛을 이어가고 있다. 10월 9일, 한글날을 맞아 다시 한번 우리의 언어생활을 되돌아보는 것은 어떨까?

‘정재환’은?

정재환은 1979년 방송에 데뷔해 개그맨이자 탤런트로 활동했다. 이후 MC 등 방송인으로 활동하다 2000년 성균관대학교 사학과에 입학해 3년 만에 수석 졸업했고, 성균관대학원에서 석사(2007), 박사(2013) 과정을 마쳤다. 현재는 한글문화연대 공동 대표를 역임하며 ‘한글 알리미’로 활동을 하고 있다. 더불어 올해 국립한글박물관에 표구와 글꼴이 영구보존된 경북 칠곡 할머니들의 ‘칠곡할매글꼴(5종)’을 홍보하는 홍보대사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수상내역 / 제1회 KBS 진행 부문 바른 언어상(1999) / 푸른 미디어 좋은언어상(1999) / 만학도 부문 대통령상 ‘21세기를 이끌 우수 인재상’(2003) / ‘백범 정신 실천상’ 백범 문화상 부문(2009) / 저서 / 자장면이 맞아요. 잠봉은?(1999) / 우리말은 우리의 밥이다(2000) / 말 잘하는 아이가 공부도 잘한다(2003) / 대한민국은 받아쓰기 중(2005) / 한글의 시대를 열다-해방 후 한글학회 활동 연구(2013) / 나라말이 사라진 날-우리말글을 지키기 위한 조선어학회의 말모이 투쟁사(2020) / 논문 / 이승만 정권 시기 한글 간소화 파동 연구(2007) / 해방 후 조선어학회·한글학회 활동 연구(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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