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토색 종이에 세로로 한자와 옛 한글이 적혀있다.

소장품 이야기 두시언해(杜詩諺解)가
교과서에 실리기까지

주황색 폴더 그림 안에 ‘두보의 시를 한글로 풀어쓴 시집 두시언해’라는 글자가 있다. 그 아래로 하얀색 네모 칸이 있다. 그 안에 충군, 애국 사상, 풍부한 시어와 율격 등 ‘이상적 시의 표준’이라 여겨진 두보의 시! 세종과 성종 대에 걸쳐 왕명에 따라 한글로 번역되고 조선시대부터 지속적인 관심을 받은 두시를 소개합니다. 라고 적혀있다. 그 밑에는 옛날 책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두보의 시라고 적혀있다. 책 그림 앞에는 곤룡포를 입은 세종대왕이 한쪽 손가락을 들고 반대쪽 손에는 책을 든 채 미소 짓는 그림이 있다. 오른쪽에는 초록색 옷을 입은 신하가 책과 붓을 들고 서 있고 그 옆에는 파란색 옷을 입은 선비가 책을 들고 미소 짓고 있다. 세종대왕의 왼쪽에는 남색 옷을 입은 선비가 책을 들고 서 있다. 그 옆에는 하늘색 옷을 입은 선비가 책을 품에 안고 활짝 웃고 있다.

『두시언해(杜詩諺解)』는 중국 성당시대 시성(詩聖)이라 불린 두보(杜甫, 712~770)의 시를 한글로 풀어쓴 시집입니다. 이 책은 두보의 한시 1,647편 전부를 주제별로 분류하고 한글로 번역해 실로 엄청난 분량을 자랑합니다. 원제는 『분류두공부시언해(分類杜工部詩諺解)』로 다소 긴 명칭을 가지고 있습니다. ‘두공부(杜工部)’라는 말은 관직명으로, 두보가 52세에 공부원외랑(工部員外郎)이라는 관직을 지낸 것에서 따온 것입니다. 즉 『두시언해』는 공부원외랑 벼슬을 지낸 당의 문인 두보의 한시를 주제별로 분류해 한글로 번역한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두시언해』는 조선시대 세종과 성종 대에 걸쳐 진행된 국가 단위의 한글 번역 사업이었습니다. 세종대에는 두시에 대한 여러 사람의 주석을 참고·교정해 『찬주분류두시(纂註分類杜詩)』라는 주석서가 간행된 바 있습니다. 이를 저본으로 하여 40여 년 뒤 1481년(성종 12년)에 『두시언해』 초간본이 간행되었습니다. 이후 인조 10년(1632)에는 초간본이 보기 힘들어지자 목판본으로 된 중간본도 냈습니다. 그렇다면 타국의 시인인 두보의 한시가 무슨 연유로 왕명으로서 언해되어 두루 퍼지게 되었을까요?

詞賦紛紛各鬪雄 한시가 어지러이 저마다 뛰어남을 다투지만
古來只有杜陵翁 옛날부터 두보가 있었을 뿐이네

조선 전기 점필재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의 시 <장의사에서 글을 읽는 제공에게 바치다(呈藏義寺讀書諸公)>일부입니다. 짧은 시문이지만 조선조 사림의 영수이자 대표적인 도학자 점필재 역시 두보의 시를 최고라 칭하고 있습니다. 이미 고려시대부터 임춘을 시작으로 이규보·이제현 등의 문인들에게 두보의 시는 일종의 교과서와 같았습니다. 조선시대에 접어들자 수많은 문인들이 두보의 시풍을 수용해 한시를 창작했습니다. 문인들은 두보 시에 담긴 충군·애국 사상, 풍부한 시어와 율격 등을 이상적 시의 표준으로 여겼습니다. 나아가 두시를 통한 시학 공부는 과거시험과도 연관돼 필수적이었습니다.

연한 갈색 종이에 한자와 옛 한글이 적힌 ‘분류두공부시언해 초간본’ 사진이 보인다. ▲ 『분류두공부시언해』 초간본(1481년)

진한 갈색 표지에 한자가 적힌 ‘분류두공부시언해 중간본’ 여러 권의 사진이 놓여있다. ▲ 『분류두공부시언해』 중간본(1632년)

이처럼 두시에 대한 긍정적 분위기 속에서 국가적 차원의 언해사업은 순차적으로 진행됩니다. 『두시언해』의 서문을 쓴 조위(曹偉, 1454~1503)와 유윤겸(柳允謙, 1420~?)은 다음과 같이 언해서 간행 목적을 밝힙니다. 첫째, 두시가 어렵기 때문에 왕명에 따라 이를 쉽게 풀이하기 위해서입니다. 성종의 명에 따라 널리 주석을 수집하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 읽고 이해하는 데에 편하게 한글로 그 뜻을 번역한 것입니다. 정본화 된 두시에 대한 표준적 이해가 가능해진 것입니다.

둘째, 세상을 교화하기 위해서입니다. 두보는 당시 전란으로 혼란스러운 나라를 걱정하고 충성으로 임금을 생각하는 시를 썼습니다. 이러한 우국·충정의 내용은 백성들로 하여금 문학적 감동과 유교적 교화를 달성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즉 유가 문학의 전범을 통한 교화를 목적으로 『두시언해』가 간행된 것입니다.

두시에 대한 문인들의 수용은 이후로도 계속됩니다. 『두시언해』가 나온 후 1739년(영조 15년)에는 한문 4대가로 이름난 택당 이식(李植, 1584~1647)의 『찬주두시택풍당비해(纂註杜詩澤風堂批解)』가 간행됩니다. 조선 시대 두시 연구의 최고 수준을 보여 주는 이 책은 두시에 대한 역대 주해들를 모아 비평을 더했습니다. 그 뒤로 정조의 명으로 두보의 율시 777수를 분류해 수록한 『두율분운(杜律分韻)』, 율시 500수를 수록한 『두육천선(杜陸千選)』이 간행되었습니다. 이 밖에도 19세기에 나온 필사본 『두율분류(杜律分韻)』는 『두시언해』의 체계를 따르며 한글 독음과 한글 번역이 같이 실려 있습니다. 이처럼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 여러 문인들은 『두시언해』를 통해 시를 학습했습니다. 더불어 왕명으로 두시와 관련된 서적이 계속 간행되었으며, 한글로 번역한 필사본이 등장할 정도로 두시와 『두시언해』의 위상은 대단했습니다.

주황색 폴더 그림 안에 '훈민정음 창제 이후 가장 대표적인 ‘역대의 문장들’ 중 하나로 꼽힌 두시언해의 시들이라는 글자가 적혀있다. 그 아래로 하얀색 네모 칸이 있다. 그 안에 세 개의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다. 동그라미 안에는 각각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가장 왼쪽에는 두시언해라는 글자가 적힌 하얀 책이 그려져 있다. 옆에는 표지에 ‘두시언해비주’라는 제목이 적힌 옛날 책을 들고 있는 손이 그려져 있다. 다음으로는 옛날 신문 그림이 여러 장 그려져 있다. 신태화: ‘한글 역대선’에 ‘훈민정음’ ‘용비어천가’, ‘월인천강지곡’ 다음에 두시를 소개 
이병주: ‘두시언해비주’를 출간해 두시의 위상을 높임
각종 언론: ‘두시언해’를 대중 독자들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책으로 언급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근대적 출판문화가 자리 잡은 뒤에도 『두시언해』에 대한 문인들과 학자들의 관심은 그치지 않았습니다. 신태화는 훈민정음 창제 이후 가장 대표할 만한 역대의 문장들을 뽑아 『한글역대선』을 발행했습니다. 여기서 「두시언해」의 시들은 「훈민정음」과 「용비어천가」 그리고 「월인천강지곡」 바로 다음에 실려 있을 정도로 중요한 작품이었습니다. 또한 해방 이후 『두시언해』 연구의 대가인 이병주는 『두시언해비주(杜詩諺解批註)』를 내어 『두시언해』의 문학적·학문적 위상을 다시금 높였습니다.

펼쳐진 한글역대선 제일집 사진이 있다. 황토색 종이에 한자가 세로로 적혀있다. ▲ 『한글역대선』 제일집(1945년)

펼쳐진 두시언해비주 사진이 있다. 하얀색 종이에 한자가 적혀있고 붉은색의 인장이 찍혀 있다. ▲ 『두시언해비주』(1958년)

이처럼 조선시대부터 해방기 이후에까지 『두시언해』에 대한 관심은 지대했습니다. 시조시인이자 국문학자인 가람 이병기는 동아일보(1939.1.17.)의 칼럼에서 『두시언해』가 국어학·국문학 연구자들의 학문적 관심을 넘어 누구나 읽고 즐겨 읊을만한 독본(讀本)이라고 주장합니다. 같은 해 동아일보의 <읽은 冊 읽는 冊 읽을 冊> 기사에서도 『두시언해』을 자세히 보고 있다는 언급이 나옵니다. 십수 년이 지난 경향신문(1956.10.21.)에서도 <燈下三問> 기사에서 『두시언해』를 추천할 만한 책으로 꼽았습니다. 그 밖에도 이미 『두시언해』가 영어와 독일어로 번역되어 비교해 가면서 읽고 있다는 기사가 있을 정도입니다. 당시 신문을 비롯한 매체들에서도 『두시언해』는 대중독자들에게 현재 읽고 있는 책 혹은 추천해 주고 싶은 책으로 소개될 정도가 되었습니다.

주황색 폴더 그림 안에 근현대 시기부터 현재까지 꾸준하게 교과서에 수록된 ‘두시언해’라는 글자가 적혀있다. 그 아래로 하얀색 네모 칸이 있다. 그 안에 보라색 책을 들고 서 있는 여자 선생님 그림이 있다. 말풍선 안에는 두시언해의 대표 작품들은 풍군애국과 애민정신, 다양한 생활정서를 드러내어 문학교육 제재로 많이 쓰였습니다라는 글자가 적혀있다. 그 왼쪽에는 학생 세 명이 웃으며 설명을 듣고 있다.

『두시언해』의 학문적·문학적 가치는 교과서에 수록되면서 정점을 찍게 됩니다. 교과서에 제재로 실린다면 해당 작품은 단순한 필독서 수준을 넘어서게 됩니다. 즉 학생이라면 반드시 읽고 감상하며, 시간이 지나면 모두가 익히 알게 됩니다. 그만큼 교과서는 지대한 영향력을 갖고 있습니다. 『두시언해』는 근현대 들어 비로소 교과서에까지 실리게 되었고, 현재까지 국어·문학 교과서에 끊이지 않고 두루 실리게 되었습니다.

해방기 국어과 교과서는 ‘조선어학회’에 의해 편찬 작업이 추진되었습니다. 당시 조선어학회는 국어교과서 편찬을 위임받은 뒤 ‘국 어 교과서편찬위원회’를 발족시켰습니다. 이때 국어과를 총괄했던 인물이 위에서 언급했던 가람 이병기였습니다. 이병기는 정인승과 함께 고등학교용 교재인 『표준 옛글』을 출판합니다. 이 교과서에는 <강촌(江村)>, <춘망(春望)>, <만흥(漫興)> 등 『두시언해』의 작품이 무려 12수가 들어갔습니다.

이병기는 19세부터 58년간 썼던 본인의 일기 『가람 일기』에 『두시언해』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드러냈습니다. 또한 자신의 연구저서인 『국문학전서』에도 “과연 두해(두시언해)는 큰 업적이었다.” 라고 언급하며 문학사적 위상을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두시언해』에 대한 그의 관심과 학문적 노력은 국어교과서에 작품이 수록되는 데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같은 시기 고등학교 3학년 국어 교과서에도 『두시언해』는 『훈민정음』과 『용비어천가』 바로 뒤에 실렸습니다.

연한 갈색 표지의 ‘표준옛글’ 사진이다. 표지 가운데에는 흐릿한 초록색으로 여러 그루의 나무 그림이 있다. 상단에는 표준옛글이라는 제목이 적혀있다. ▲ 『표준 옛글』(1955년)

‘고등국어 3’ 사진이 있다. 표지가 낡아서 하단 부분이 찢긴 모습이 보인다. 상단에는 ‘고등국어’라는 제목이 적혀있다. ▲ 『고등 국어 Ⅲ』(1956년)

또한 이병기의 『표준 옛글』과 같은 독본류(讀本類) 교과서인 『고문독본』, 『고전독본』 (1차 교육과정), 『우리옛글』, 『모범고전』(2차), 『고전』(2차·3차), 『고전문학』(4차) 등의 ‘독본류(讀本類)’ 교과서에 계속적으로 실리게 됩니다. 읽기용 교과서인 독본류 교재들은 문학작품들을 비평적 기준에 따라 골라 엮은 것으로, 이렇게 ‘선택된’ 작품감상집은 이후 해당 작품의 교과서 수록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다시 말해 가람 이병기가 1955년 『표준옛글』 안에 <杜詩諺解(두시언해)에서>’를 넣은 뒤로 작품 선택의 차이는 있지만 계속적으로 교과서에 《두시언해》가 수록되고 있습니다.

하늘색 표지의 ‘고문독본’표지 사진이다. 상단에 고등학교 국어과정 고문독본 김형규라는 글자가 적혀있다. ▲ 『고문독본』(1958년)

연한 갈색 표지의 ‘고전독본’ 표지 사진이 보인다. 상단에 고등학교 국어과 고전독본 양주동 엮음이라는 글자가 적혀있다. ▲ 『고전독본』(1956년)

황토색 표지의 ‘모범고전’ 표지 사진이 보인다. 초록색 줄이 바둑판처럼 그려져 있다. 표지 상단에 인문계 고등학교 모범고전 김성재라는 글자가 적혀있다. ▲ 『모범고전』(1977년)

미색 표지의 ‘우리옛글’ 표지 사진이 있다. 상단에 파란색 글씨로 문교부 안정필 우리 옛글이라는 글자가 적혀있다. ▲ 『우리옛글』(1958년)

『두시언해』는 당의 시인 두보의 작품을 한글로 풀어 쓴 번역문학임에도 불구하고 전후기~7차 교육과정 국어교과서에서 높은 출현 빈도수를 보여줍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윤선도의 시조나 정철의 가사 『관동별곡』 보다도 많은 수치입니다. 물론 『두시언해』의 문학사적 위상을 생각해 보면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교육적 측면의 이유도 있습니다. 『두시언해』는 앞에서 설명했던 초간본(15세기)과 중간본(17세기)의 언어적 차이를 통해 『용비어천가』나 불경언해와 더불어 국어사(國語史)·문법 교육에서 활용되었습니다. 또한 『두시언해』의 대표적 작품들은 유학을 바탕으로 한 충군애국과 애민정신, 다양한 생활정서를 드러내어 문학교육 제재로도 많이 쓰였습니다. 이렇듯 국어교육에서 어학·문학의 교육적 제재를 모두 충족시킨 것입니다. 현재 국어교과서에서 고전시가에서 『관동별곡』, 고전소설에서 『춘향전』이 대표적 작품이 됐다면, 언해류 문학에서는 단연코 『두시언해』가 으뜸일 것입니다.

주황색 폴더 그림 안에 ‘언해시 <춘망>, 전쟁으로 폐허가 된 장안에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시로 노래한 두보’라는 글자가 적혀있다. 하단 네모 칸 안에는 나무 그림과 쓸쓸한 표정의 할아버지 그림이 그려져 있다. 할아버지는 쓸쓸한 표정을 짓고 있다. 할아버지 머리 위에는 ‘나라는 망해도 산하는 그대로인데 성안에는 봄이 와서 초목이 짙어졌구나. 자연의 아름다움과 인간사의 시련을 선명하게 대비해서 보여주다’라는 글자가 적혀있다.

마지막으로 『두시언해』 중에서 현재까지 교과서에 꾸준히 실리고 있는 작품 하나를 소개해 드립니다. 『분류두공부시언해』 중간본 권10에 수록되어 있는 언해시 <춘망(春望)>입니다.

<춘망> 분류 두공부시언해 중간본의 사진이 있다. ‘춘망’의 내용이 한자와 옛 한글로 빼곡하게 적혀있다. ▲ <춘망(春望)>, 『분류두공부시언해』 중간본 권10, 안병희 소장

<춘망(春望)>
國破山河在 나라히 파망(破亡)ᄒᆞ니 뫼콰 ᄀᆞᄅᆞᆷᄲᅮᆫ 잇고
城春草木深 잦 아ᇇ 보ᄆᆡ 플와 나모ᄲᅮᆫ 기펫도다.
感時花濺淚 시절(時節)을 감탄(感歎)호니 고지 누ᇇ므를 ᄲᅳ리게코
恨別鳥驚心 여희여슈믈 슬호니 새 ᄆᆞᄋᆞᄆᆞᆯ 놀래노다.
烽火連三月 봉화(烽火)ㅣ 석 ᄃᆞᄅᆞᆯ 니어시니
家書抵萬金 지빗 음서(音書)ᄂᆞᆫ 만금(萬金)이 ᄉᆞ도다.
白頭搔更短 센 머리ᄅᆞᆯ 글구니 ᄯᅩ 뎌르니
渾欲不勝簪 ᄃᆞ 빈혀ᄅᆞᆯ 이긔디 몯ᄒᆞᆯ ᄃᆞᆺᄒᆞ도다.

왼쪽이 두보의 시 원문이고 오른쪽이 한글로 풀어 쓴 언해시입니다. 두보가 안녹산의 난으로 인해 폐허가 된 장안에서 전쟁의 비극을 목도하고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애절하게 노래한 5언율시(律詩)입니다. 현대국어에 맞게 해석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나라는 망해도 산하는 그대로인데
성 안에는 봄이 와서 초목이 짙어졌구나.
시절을 한탄하니 꽃도 눈물을 뿌리게 하고
이별을 슬퍼하니 새소리에도 가슴이 놀라는구나.
봉화는 석 달째 이어지고
집의 소식은 만금보다 값지네.
흰머리는 긁을수록 더욱 적어져
다 모아도 비녀를 이기지 못할 듯하네.

안녹산의 난으로 두보는 적군에게 사로잡혀 장안에 머물게 됩니다. 폐허가 되어버린 장안과 대조적으로 산천초목의 푸르름은 변함이 없습니다. 시의 화자인 두보는 망해버린 나라와 자신의 처량한 신세를 한탄합니다. 자신과는 달리 봄날 아름답게 피어나는 꽃을 보니 감정이 북받쳐 올라 눈물이 흐릅니다. 너무나도 혼란스러운 이 시기에 새소리만 듣고도 놀랍니다. 장안에 전쟁의 봉화가 끊이지 않고 이어지자, 고향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너무나도 간절합니다. 두보는 몸과 마음이 쇠약해지고 머리도 빠져 빗질을 해도 머리카락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비녀조차 꽂기 힘든 자신의 모습에 슬퍼하는 화자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전란으로 인한 비통한 심정을 노래한 <춘망>은 자연의 아름다움과 인간사의 시련을 선명하게 대비해 보여줍니다. 이로써 전쟁의 비극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 나라에 대한 걱정 등을 잘 표현한 작품입니다.

은필관(전시운영과 학예연구사)

04383 서울시 용산구 서빙고로 139 국립한글박물관
대표전화 02-2124-6200, 단체 관람 02-2124-6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