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한글박물관 소식지 2017. 8.

조선어학회 수난 사건은 위대한 독립운동이었다 권재일 (한글학회 회장)

1945년 8월 17일 함흥형무소 앞, 최현배 선생, 이극로 선생, 이희승 선생, 정인승 선생 네 분의 조선어학회 선열들이 모진 고문으로 지칠 대로 지친 몸을 이끌고 감옥 문을 나선다. 조국이 광복된 지 이틀 만이다. 감옥에서 얼마나 기다렸던 조국 독립이며, 얼마나 쓰고 싶었던 우리말, 우리글이었던가?

이 네 분 선생은 바로 ‘조선어학회 수난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나오신 것이다. 조선어학회 수난 사건이란 일본 경찰이 1942년 10월 사전 편찬을 주도했다는 죄목으로 서른세 분의 조선어학회 선열들을 홍원경찰서와 함흥형무소에 가두고 모질게 고문해 이윤재, 한징 두 선열이 감옥에서 돌아가시고 다른 분들은 광복 전후에 반죽음 상태로 풀려난 사건이다. 이는 일본 식민통치가 자행한 가장 잔혹한 민족 말살 책동이며,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슬프면서도 그러나 가장 빛나는 독립투쟁이었다. 이제 조선어학회 수난 사건이 어떻게 전개됐으며, 우리 민족사에 담긴 의미는 어떠한 것인지 살펴보기로 하자.

민족을 지키고자 하면 우리 말글을 지켜야,
조선어학회의 민족혼

언어는 한 나라의 상징이다. 그 상징에는 역사와 문화가 담겨 있다. 그래서 언어는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나 참으로 소중한 것이다. 일찍이 주시경 선생께서 ‘말이 오르면 나라가 오른다’라고 말씀하신 것도 바로 이런 뜻을 품고 있다. 우리가 우리말, 우리글에 자긍심을 가지고 더 나아가서 우리 말글의 발전에 힘써야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말은 오랜 역사 속에서 꿋꿋이 발전해 왔다. 우리말을 적는 우리글, 한글 역시 어려운 역사 속에서 지켜 왔다. 그런데 우리 말글의 역사 가운데 가장 어려웠던 시기를 꼽자면 바로 일제 강점기라 하겠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은 국토를 병합하고 나서 우리 민족을 저들에 통합시키고 문화를 빼앗으려 했고, 그 문화의 알맹이라 할 우리말을 쓰지 못하게 했다. 이러한 상황이니 우리 선조들은 우리 민족을 지키기 위해, 우리 문화를 지키기 위해 우리 말글을 지키려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큰 힘을 쏟았다. 이러한 중심에 조선어학회가 있었다.

1945년 촬영된 조선어학회 회원들 기념사진(출처 : 한글학회) ▲ 1945년 촬영된 조선어학회 회원들 기념사진(출처 : 한글학회) 지금의 한글학회인 조선어학회는 민족혼을 지키기 위해 우리 말글을 연구할 목적으로 1908년 8월 31일 주시경, 김정진 선생 등이 창립한 국어연구학회를 모체로 한다. 조선어학회 학자들은 일본의 식민 통치 아래 나라와 민족을 되찾고 문화를 되살리기 위한 길은 오로지 우리 말글을 지키는 데 있다는 데에 뜻을 함께했다. 그 일을 펼치고자 한글날을 만들고(1926년), 조선어사전편찬회를 조직해 《우리말큰사전》을 편찬하기로 하고(1928년), 이를 위해 한글맞춤법통일안을 제정하고(1933년), 표준말을 사정하고(1936년), 외래어표기법통일안도 제정했다(1940년).

모진 고문 이겨내고 옥고를 치르게 된
조선어학회 수난 사건

그러나 침략전쟁에 광분하고 있었던 1940년대의 일본은 조선에 대한 식민 통치를 더욱 강화하면서 민족 말살 정책을 추진했다. 조선인의 이름과 성을 일본식으로 바꾸도록 하고 조선말을 쓰지 못하게 하고 학교에서 조선어 교육을 폐지했다. 이러한 암담한 상황에서 조선어학회 선열들은 핍박과 감시를 받아가며 우리 말글을 지키고 가꾸는 투쟁을 이어갔다.

조선어학회가 《우리말큰사전》 편찬에 밤낮을 가리지 않던 1942년, 함흥 영생고등여학교 학생 박영옥이 기차 안에서 친구들과 조선말로 대화하다가 경찰에 발각돼 취조를 받게 된 사건이 일어났다. 경찰은 조사 결과 학생들에게 민족혼을 일깨운 이가 조선어학회에서 사전을 편찬하고 있는 정태진 선생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해 9월 5일에 정태진 선생을 연행, 조사해 조선어학회가 민족주의 단체로서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고 보고, 10월 1일부터 조선어학회 선열들을 검거하기 시작해, 사전 편찬에 직접 참여했거나 재정적으로 후원한 분을 검거하니 1943년 4월 1일까지 모두 서른세 분에 이르렀다.

이분들은 홍원경찰서 유치장에 있으면서, 물 먹이기, 공중에 매달고 치기, 비행기태우기, 메어치기, 난장질하기, 불로 지지기, 개처럼 걷기, 뺨치기, 얼굴에 먹으로 악마 그리기, 서로 때리기 등 이루 다 들 수 없는 고문을 당했다. 결국 이분들에게 ‘고유 언어는 민족의식을 양성하는 것이므로 조선어학회의 사전 편찬은 조선 민족정신을 유지하는 민족운동’이라는 이유로 내란죄를 덮어씌웠다. 조선어학회는 문화운동의 가면을 쓰고 어문운동을 통해 민족의식을 북돋워서 조선 독립을 위한 실력을 신장했다고 판결했다.

최종적으로 이극로 선생은 징역 6년, 최현배 선생은 징역 4년, 이희승 선생은 징역 2년 6개월, 정인승 선생과 정태진 선생은 징역 2년, 그리고 김법린, 이중화, 이우식, 김양수, 김도연, 이인 선생은 징역 2년에 집행유예 4년이었다.

자주독립 향한 한글학자들의 노력,
독립운동으로 기억해야

조선어학회 수난 사건 예심결정문 일부 ▲ 조선어학회 수난 사건 예심결정문 일부 조선어학회 수난 사건은, 단순히 국어학자들이 우리 말글을 지키려다 일제의 탄압을 받은 사건이 아닌, 민족혼을 일깨우고 자주독립을 쟁취하려는 독립운동으로 평가해야 한다. 그것은 이 사건에 연루돼 투옥된 분 가운데는 국어학자보다 민족주의자, 독립운동가가 더 많은 데서도 그 성격을 알 수 있다. 그분들 가운데 광복 후 대한민국의 초대 법무부장관에 이인 선생, 초대 재무부장관 김도연 선생, 초대 문교부장관 안호상 선생이 포함된 것을 보더라도 조선어학회 투쟁이 단순한 말글 투쟁이 아니라 독립운동이었음을 알 수 있다.

1945년 광복 후 재판의 증거물로 홍원으로 갔다가 잃어버렸던 《우리말큰사전》 원고를 9월 8일 서울역 창고에서 찾아냈다. 뜻밖의 기쁨이었다. 이를 기반으로 조선어학회는 1947년에 《조선말큰사전》 첫째 권을 발간하니 올해가 70주년이고, 1957년에 6권 모두 발간하니 올해가 60주년이다.

조선어학회에서 편찬한 조선말큰사전(1947) ▲ 조선어학회에서 편찬한 《조선말큰사전》(1947) 따옴표
말은 사람의 특징이요, 문화의 표상이다.
조선 말은, 우리 겨레가 반 만 년 역사 생활에서 문화 활동의 말미암던 길이요, 연장이요, 또 그 결과이다. 그 낱낱의 말은, 다 우리의 무수한 조상들이 잇고 이어 보태고 다듬어서 우리에게 물려 준 거룩한 보배이다. 그러므로, 우리 말은 곧 우리 겨레가 가진 정신적 및 물리적 재산의 총 목록이라 할 수 있으니, 우리는 말을 떠나서는, 하루 한 때라도 살 수 없는 것이다.
- 《조선말큰사전》 머리말의 첫머리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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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8월 29일, 서울 세종로공원에서 한글학회 회원과 조선어학회 선열 유족, 그리고 많은 시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한글학회와 서울시가 ‘조선어학회 한말글 수호 기념탑’ 제막식을 열었다. 우리 말글을 지키며 민족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선열들의 고귀한 뜻에 조금이라도 보답하고자 한 징표였다. 이제 우리는 다시금 광복절을 맞이하면서 선열들의 높은 뜻을 기리며, 우리말과 우리글의 가치를 드높이는 마음을 힘차게 펼쳐나가야 할 것이다.

권재일

권재일 한글학회 회장 권재일 회장은 1976년 서울대 언어학과에 입학한 뒤 동 대학원에서 문학 석·박사 과정을 공부했다. 1994년 서울대 인문대학 언어학과 교수로 취임했으며, 이후 방송광고심의위원회 심의위원(2000년), 국립국어원 어문규범연구부장(2003년), 서울대 인문학연구원장(2005년), 국립국어원 원장(제8대), 대통령 직속 통일준비위원회 사회문화분과위원회 민간위원(2014년) 등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