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바뀌고 시간이 흐르면 달라지는 우리 생활상처럼 한글문화도 시시각각 변하고 있다. 특히 최근 한글을 디자인적으로 활용한 공간이 많아지고 있다. 이번 호에서는 한글이 듬뿍 녹아있는 방학천 한글문화거리, 서울지역 내 한글간판, 여주 한글시장을 찾았다.
방학천 ‘한글문화거리’로 대변신!
다닥다닥 붙은 붉은 벽돌 건물들 사이로 가득 늘어서 있던 ‘쟈스민’, ‘양지마을’ 등의 유흥주점은 사라지고 간판마저 철거된 빈 건물만이 남아있다. 서울 도봉구 방학천 거리는 천변을 중심으로 늘어선 유흥주점으로 홍역을 치르던 곳이다. 새벽 늦게까지 고성방가와 싸움이 오가는 일이 잦아 인근 주민들의 불편도 상당했다. 하지만 2012년 방학천 생태 하천 조성 공사가 마무리되고 자전거 도로까지 개통되면서 변화가 감지됐다. 도봉구는 팔을 걷어붙이고 일대 환경 개선 사업을 시작했다.
지난 2016년 4월, 도봉구는 지역 경찰서, 교육청, 시민단체 등과 협업을 통해 유흥주점 단속 전담팀(TF 팀)을 꾸려 지속적으로 합동 단속을 펼쳤다. 당시만 해도 방학천변으로 30곳이 넘게 영업 중이던 유흥주점은 현재 세 곳을 제외하고는 모두 폐업했다. 도봉구는 유해업소와의 재계약을 막고자 빈 매장을 구에서 인수할 수 있도록 설득했다.
유흥주점이 사라진 지금, 도봉구는 젊은 예술가들에게 공간을 임대해줄 계획이다. 지난 6월부터 7월까지 한글문화거리의 매장에 입주할 예술가를 모집했다. 임차 후 6개월간 임차료를 지원하고, 구조 변경 비용(1,250만~1,780만 원)과 물품 구매비(430만~620만 원)까지 지원한다는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월 임대료 또한 35만 원에 불과해 유리공예, 가죽공예, 판화디자인 등을 업으로 삼은 다양한 작가들의 입주가 선정된 상태다.
도봉구는 예술가 거리를 만드는데 그치지 않고 한글을 주제로 삼는 문화거리를 조성한다는 포부다.
방학천을 따라 자리 잡은 정의공주 묘와 《훈민정음》을 지켜낸 간송 전형필 선생의 가옥, 시인 김수영 문학관, 연산군묘 등을 적극 활용하겠다는 것. 방학천 산책로에는 정의공주와 세종대왕의 모습이 아름답게 음각돼 있다.
▲ 방학천
▲ 방학천에 그려진 정의공주 음각화
▲ 주민 커뮤니티 공간 “방학생활” 개소식
한글간판이 대세!
한글간판이 돌아왔다. 1990년대 이래로 영어 만능주의가 생활 전반에 자리 잡으면서 길거리를 수놓았던 영어간판에서 탈피하고 있는 것. 더불어 ‘영어를 사용하면 세련돼 보인다’ 혹은 ‘한글로 간판을 만들면 촌스럽다’는 잘못된 인식 또한 희석되고 있다.
아름다운 한글간판을 볼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장소는 서울의 인사동이다. 인사동의 ‘스타벅스’ 매장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외국인 관광객들에게도 명소로 화제를 모았는데, 매장을 나타내는 간판을 한글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기존의 스타벅스는 전 세계 어디에서라도 동일한 주제의 경관를 요구하기로 유명한데, 영어가 아닌 해당 국가의 언어로 간판을 만든 것이 한국의 인사동점이 최초이기 때문. 더불어 전통과 한국적인 멋을 중시하는 인사동 거리의 분위기에 맞춰 다른 상점들도 고유의 로고와 영문간판에서 탈피해 한글간판을 달기 시작했다.
관공서 또한 한글간판 교체 사업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고 있다. 서울시는 지난 2014년 점차 사라져가는 헌책방을 활성화하고 한글의 아름다움을 전파하기 위해 ‘청계천 헌책방 간판교체 공동사업’을 시행했다. 청계천 내에서 영업 중인 헌책방 25곳의 간판을 모두 한글로 교체하고 청계천로에 1960~1970년대 ‘옛 헌책방거리’를 축소한 조형물까지 전시했다. 또, 종로구는 오는 11월까지 돈화문로의 노후한 간판을 한글 중심의 디자인 간판으로 개선하는 ‘돈화문로 간판이 아름다운 거리’ 사업을 실시할 계획이다. 돈화문로의 124개 사업장 중 60개 업체를 선정해 각 250만 원의 간판 개선 비용을 지원한다.
젊은이들의 인식 또한 변화하고 있다. 대표적인 SNS 채널인 ‘인스타그램’에 ‘한글간판’을 입력하면 1,500개에 달하는 아름다운 한글간판들이 검색된다. 깔끔하고 단정한 느낌을 주는 한글간판이 젊은 층을 공략한 것.
▲ 청계천 중고서적 거리 한글간판
▲ 인사동 글로벌 브랜드의 한글간판
▲ 인사동 한글간판
“한글이 손님들 불러 모아요” 여주 한글시장
널찍한 너비, 일자로 시원하게 뚫린 대로를 자랑하는 여주 한글시장은 지명을 사용하던 중앙로 시장에서 한글시장으로 이름을 바꾸게 된 뒤 경기도권의 대표적인 전통 시장으로 떠올랐다. 보슬비가 내리던 장날에 찾아간 한글시장에는 5일장을 맞아 손님을 맞이하는 상인들의 목소리가 왁자지껄 울려 퍼지고 있었다.
여주 한글시장은 지난 2016년 문화관광형시장 육성사업을 통해 2018년까지 총 18억 원을 지원받아 한글간판정화사업, 전시 사업, 전기선 지하화 사업 등을 실시했다. 시장 초입에서 만난 상인회 천병오 감사의 한마디 한마디에 시장에 대한 자긍심이 묻어났다.
시장을 돌아보니 방문객들을 위한 배려가 돋보였는데, 시장 곳곳에 자음을 형상화한 구조물로 구역을 나눠놓아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있었고, 무료 와이파이도 운영하고 있었다. 시장 중앙부에는 아담하고 친근하게 제작된 세종대왕 동상이 인자한 얼굴로 웃음 짓고 있으며, 한글을 디자인해 의자로 만든 쉼터에 앉아 쉴 수도 있었다. 큰소리로 손님을 모으던 족발집 사장님은 자신을 ‘뚱아저씨’라 불러달라며 “한글시장으로 변화하면서 손님이 늘어났으니 장사하는 상인 입장에서는 당연히 최고로 좋은 일.” 이라며 엄지를 추켜올린다.
이에 더해 한글시장에서는 여주 시민들의 삶과 애환을 담은 생활문화전시관 ‘여주두지’를 운영하고 있다. 전시관에는 여주 곳곳에서 생활하던 주민들에게 기증받은 물건이 가득 전시돼 있었다. 옛날 사용하던 목재 농기구, 목화씨를 빼주는 도구 ‘씨아’ 등의 물건은 물론 만화 작가가 주민들의 모습을 익살스럽게 그려낸 그림들, 그리고 빛바랜 흑백사진까지 어머니, 아버지 혹은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삶이 그대로 녹아나 있다. 두지의 안내를 맡고 있는 손영옥 씨는 “두지는 쌀을 보관하던 ‘뒤주’를 한자로 적은 것.”이라며, “어르신들이 소중한 곡식을 뒤주에 보관하듯이 어르신들의 삶을 이곳 두지에 소중하게 담아놓고 있다.”고 말했다.
▲ 여주 한글시장 정문
▲ 한글을 이용한 의자와 안내 조형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