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박웃음 2021.1. 제 8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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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아 놀자 한국과 독일의 같고도 다른 문자 혁명의 길,
온라인 전시로 만나다

국립한글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만 만나볼 수 있었던
<문자 혁명-한국과 독일의 문자 이야기>가 온라인 전시로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다.
이번 전시는 인쇄술과 자국어 출판이 가져온 삶의 변화들을 중심으로
한국과 독일의 같고도 다른, 다르고도 같은 문자이야기를 살펴본다.
인터넷만 연결된다면 언제, 어디서든 즐길 수 있는
‘국립한글박물관 최초’ 온라인 전시를 함께 감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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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 혁명-한국과 독일의 문자 이야기>
온라인 전시, 어떤 모습일까

온라인 전시의 장면캡쳐. 두 명의 고대인이 서로 책을 펼쳐든 채 무언가를 받아 적고 있는 서양화. 자막에 ‘문자가 신을 찬양하는 도구로 소수의 손에 독점되던 시대가 있었다.’라고 적혀있다.

온라인 전시의 장면캡쳐. 두 명의 여성과 한 명의 남성이 등장하는 흑백 그림 작품. 자막으로 ‘인쇄술은 문자를 많은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길을 열었다. 그것은 마치 신이 인류에게 내려준 축복과도 같았다.’라고 적혀있다.

세종대왕의 초상화와 구텐베르크의 초상화. 빨간 어의를 입은 세종대왕이 근엄하게 정면을 바라보며 노란빛의 어좌에 앉아있다. 흑빛 배경에서 모자를 쓴 채 하얀 수염을 가슴까지 기른 구텐베르크가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자막에는 ‘그러나 문자 향유의 확대는 신의 축복이 아닌, 인간의 노력과 의지로 이루어 낸 혁명이었다.’라 적혀있다.

국립한글박물관은 개관 이후 처음으로 <문자 혁명-한국과 독일의 문자 이야기> 전시를 온라인으로 선보이고 있다. 코로나 19의 확산세로 박물관 방문이 어려운 관람객들을 위해 준비한 이번 프로그램은 컴퓨터와 모바일에 접속해 주요 전시 자료와 전문가의 인터뷰를 감상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이번 전시는 인쇄술과 서체를 주제로 아시아의 한국과 유럽의 독일에서 어떤 사건들이 있었는지, 양국의 문자 문화는 어떻게 변화해왔는지를 다룬다. 특히 독일의 구텐베르크박물관, 라이프치히대학도서관과 협력해 루터의 <독일어 성서(1536년)>, 황제 막시밀리안 1세의 명으로 만든 모험담 <토이어당크(1517년)> 등 쉽게 접하기 어려운 자료를 만나볼 수 있다. 국립한글박물관에서는 이번에 보물로 지정된 <간이벽온방언해(1578년)> 등의 자료들을 대거 소개한다.

신을 향한 문자, 사경과 성서

‘손으로 써 내려간 불경 사경’이라 적혀있고 우측에는 사경의 실제 모습이 두 장 담겨 있다. 위쪽 그림에는 금빛으로 불화가 그려져있고, 아래쪽 그림에는 세로쓰기 한글로 뺴곡이 한자가 적혀있다.

‘성서 신의 말씀이 담긴 필사본’이라 적혀있고 가운데에는 중세 삽화가 담겨 있다. 삽화 우측에 위치한 7명의 인물 중 한 명이 좌측 3인의 인물 중 가장 우측의 인물에게 성서를 건네고 있다. 그림 하단에는 ‘성인에게 필사본을 바치는 필경사(15세기) 한 필경사가 자신이 쓴 필사본을 프란체스코 성인에게 바치고 있다. 필사본을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으며 양피지 또한 쉽게 구할 수 없는 값진 것이었으므로, 필사본 책은 매우 귀한 것이었다.“라고 적혀 있다.

신의 말씀과 행적을 찬양하기 위해 만든 책은 소수에게만 독점되었다. 그렇기에 문자의 향유는 부의 상징이자 특권이었다. ‘사경’은 불경을 손으로 써 내려가는 것은 부처를 찬양하고 그 말씀을 전하는 신앙 행위였다. 값비싼 재료로 정성 들여 쓰고 화려한 장식을 더 하여 부처를 향한 경외심을 극대화한 것이 특징이다. 유럽 중세 시대에 신의 말씀은 수도원에서 성직자들의 필사를 통해 ‘성서’로 전승되었다. 금박과 은박, 채색과 삽화, 장식 등으로 화려함을 더한 성서는 소수의 전유물이었다.

인쇄술, 공유의 길로

임진자 활자의 모습. 검은빛이 도는 한자 활자들을 늘어놓은 모습. ▲ 임진자(壬辰字)(1772)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자치통감사정전훈의의 첫 페이지. 갈색으로 바랜 종이 우측면은 비어있고, 좌측에는 한문 세로쓰기로 글자들이 적혀있다. ▲ 자치통감사정전훈의
(資治通鑑思政殿訓義)(1434)

구텐베르크의 초상화. 흑빛 배경에서 모자를 쓴 채 하얀 수염을 가슴까지 기른 구텐베르크가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 요하네스 구텐베르크(Johannes Gutenberg)
(구텐베르크 박물관 소장)

인쇄술의 발명은 많은 사람들이 문자를 사용할 수 있게 만든 혁명과도 같은 사건이었다. 필사보다 복제가 쉬워졌으며 지식과 정보가 더 빨리 더 널리 공유되기 시작했다. 고려에서는 13~14세기에 세계에서 가장 먼저 금속활자를 만들어 책을 인쇄했다. 고려를 이은 조선은 국가의 주도로 수십 차례 활자를 만들고 인쇄, 출판 사업을 주도하여 문치주의를 실현했다.

독일에서 귀한 필사본의 권위를 떨어뜨린 것은 1450년대 요하네스 구텐베르크(1400?~1468)가 발명한 금속활자 인쇄술이었다. 1999년에 지난 1000년 동안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위에 구텐베르크가 꼽힐 만큼 서양에서 인쇄술의 발명은 혁명적인 일이었다. 필사본 시대에는 책 1권을 만드는 데 대략 2개월이 걸렸으나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개량 이후로는 일주일 동안 책 500권가량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고 한다.

자국어 인쇄, 진정한 소통으로

월인천강지곡의 첫 페이지와 세종대왕의 어진. 월인천강지곡을 제목으로 옛한글이 세로쓰기로 이어지고 있다. 세종대왕의 어진은 빨간 어의를 입은 세종대왕이 근엄한 모습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1447년 경)

사리영응기의 내지. 양옆으로 펼친 노란 옛 종이 위에 옛한글이 세로쓰기로 가득 적혀있다. ▲ 사리영응기(舍利靈應記)(1449)

최초의 독일어 성서의 모습. 종이 위에 두 개의 세로단으로 나뉘어 작은 글씨로 빼곡하게 성서의 내용이 적혀 있다. 인쇄업자 요하네스 멘텔린의 초상화. 모자를 쓰고 흰 수염이 목을 가리게 기른 인물의 모습. ▲ 최초의 독일어 성서(1466)

인쇄술로 인해 더욱 많은 사람들이 책을 소유하게 되었지만, 한국은 한자로 독일은 라틴어로 책을 만들고 나누었기 때문에 입말과 글말이 달랐다. 세종은 훈민정음을 만들어 문명의 길을 열었고, 독일에서도 독일어 인쇄물이 나오기 시작한다.

세종은 말과 글이 다른 언어생활의 어려움을 통찰하고 일반 백성들도 쉽게 익히고 쓸 수 있는 자국어 문자인 ‘훈민정음’을 창제한다.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은 세종이 직접 지은 한글 노랫말이다. 훈민정음 창제 후 처음 간행한 한글본 중 하나이며, 한자를 병기할 때 한글 아래 작은 글자로 한자를 사용한 것 이외에는 한글을 사용하여 인쇄했다. <사리영응기(舍利靈應記)>는 조선시대 문신 김수온(金守溫, 1410~1481)이 세종의 명령을 받아 편찬한 부처님 사리에 대한 영험기이다. 사람의 고유어 이름을 발음 나는 대로 한글로 인쇄한 최초의 책이다.

라틴어로 인쇄본을 출판하던 독일에서도 민간의 전문 상업 인쇄업자들을 중심으로 민중어인 독일어 인쇄 출판이 활발해진다. 독일어 인쇄본은 인기 있는 화가의 삽화가 어우러져 더욱더 많은 사람들에게 읽혔다. 요하네스 멘텔린(Johannes Mentelin, 1410~1478)은 스트라스부르크(Strasbourg)에서 활동한 민간 인쇄업자이다. 그는 라틴어 성서를 인쇄하며 많은 돈을 벌었는데, 독일어 성서의 수요를 확인하고 구텐베르크 성서가 나온 지 11년 뒤인 1466년, 처음으로 독일어 성서를 만들어 인쇄했다.

번역, 사상 전파의 촉매가 되다

능엄경언해의 내지. 갈색으로 빛바랜 종이에 한문 세로쓰기로 한자가 가득 적혀있다. 세조의 채색되지 않은 초상화. 익선관을 쓰고 어의를 입은 세조의 모습이 선으로 그려져 있다. ▲ 능엄경언해(楞嚴經諺解)(1461)

루터의 독일어 성서 내지. 가로쓰기의 작은 글씨로 빼곡이 성서 내용이 적혀 있고, 좌측에는 벌거벗은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 앞에 서있는 모습이 흑백 삽화로 그려져 있다. ▲ 루터의 독일어 성서(1536)

한국과 독일 모두 종교와 사상 전파를 위한 번역이 활발해졌다. 한국에서는 왕실 주도로 불교서, 유교서 언해가 시작되고, 독일에서는 루터가 독일어 인쇄물을 통해 종교 개혁을 이뤄낸다. 조선은 국가 주도로 이루어진 서적의 번역 새로 만들어진 글자인 한글을 정착시키기 위해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한문으로 된 책을 한글로 번역하는 것이었다. <능엄경언해>(1461)는 왕실이 주도해서 제일 먼저 번역한 불경이다. 세조가 직접 번역에 참여해서 제작을 주도하였다. <능엄경언해>에 쓴 한글 금속활자는 <월인천강지곡>과 <석보상절>에 쓰인 금속활자 다음으로 만든 것인데 앞선 활자의 서체와 달리 붓글씨의 느낌이 난다. 독일의 신학자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인쇄술을 ‘복음 전파를 위해 신이 주신 최고의 마지막 선물’이라고 표현했을 정도로 인쇄술은 종교 개혁의 큰 공신이었다. 루터는 1522년부터 죽기 1년 전인 1545년까지 독일어 성서의 내용을 보완하고 출판한다. 라틴어 성서는 소수만 소유하고 읽을 수 있는 것이었으나, 루터의 성서 번역과 출판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성서를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자국어 출판, 다양한 분야로 확산되다

삼강행실도언해 내지. 우측에는 목차가 세로쓰기 한자로 적혀있으며, 좌측에는 기왓집 안에서 두 명의 인물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흑백 삽화로 그려져 있다. ▲ 삼강행실도언해(三綱行實圖諺解)(1580년경)
 

홍길동전의 첫 페이지. 우측면은 비어있고, 좌측에는 ‘홍길동전’이란 제목으로 시작하여 옛한글 세로쓰기로 내용이 시작된다. ▲ 홍길동전(洪吉童傳)(조선후기)
 

이솝 우화 내지. 두 개의 단으로 나눠 가로쓰기로 빼곡이 적힌 이솝우화 가운데로 흑백 삽화가 그려져 있다. 삽화에는 사막에서 말과 함께 길을 걷는 두 명의 인물이 그려져 있다. ▲ 이솝 우화(Äsopische Fabeln)
(1481)(구텐베르크박물관 소장)

자국어 출판으로 인해 독자층이 확대되고 다양한 분야의 인쇄본이 만들어지면서 문자를 통한 소통과 향유가 확산되었다. 조선과 독일 모두 인문, 철학, 과학, 실용 등 장르가 확산되었으며 문학의 발전과 상업 출판이 만든 베스트셀러가 탄생했다. 조선의 『삼강행실도언해(三綱行實圖諺解)』는 본이 될 만한 효자, 충신, 열녀의 이야기가 삽화와 함께 수록되어 있으며, 한글로 인쇄되면서 널리 읽히기 시작했다. 한글 소설 <홍길동전>은 신분 차별과 사회 부조리에 대한 내용으로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었다.

독일의 <이솝 우화>는 기원전 6세기 그리스인 이솝(Aesopica)이 지은 것으로, 동물들의 말과 행동을 통해 어린이들에게 지혜와 교훈을 주는 이야기책이다. 1484년에 영국에서 번역본이 처음 인쇄된 이후로 유럽 전역에 퍼지면서 독일어로도 출판되었다. 그 밖에도 그림 형제가 독일의 민담을 모아 엮은 전래 동화집에는 <백설공주>, <헨젤과 그레텔>, <라푼젤>, <개구리 왕자>와 같이 현재에도 널리 읽히고 있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이처럼 오늘의 우리가 문자로 숨쉬기까지, 그 여정에는 같고도 다른, 다르고도 같은 한국과 독일의 문자 이야기가 숨어있다. 온라인 전시를 통해 지금 여기의 우리가 당연하게 누리고 있었던 문자의 의미와 가치를 다시금 생각해보고, 코로나19 상황이 나아지면 국립한글박물관을 찾아 생생한 문자 이야기를 만나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