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박웃음 2021.1. 제 8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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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저장소 ‘태-영화체’ 등 400여종의 한글 글꼴 개발,
김화복

‘기록’의 역사적 가치와 범주가 확장되면서 구술자료의 가치와 역할도 나날이 중요해지고 있다.
한글의 역사적인 시대를 함께한 다양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구술 기록으로 남기고,
다면적 구술 기록의 수집을 통해 사건을 총체적으로 보존하는 일은 국립한글박물관의 주요한 활동 중 하나이다.
국립한글박물관은 지난 2015년도부터 한글문화인물 구술기록사업을 통해 구술자료를 수집하고 있다.
한박웃음은 디지털한글박물관에 보관된 구술 아카이브 자료를 요약해 소개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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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화복
  • (주)태시스템 서체개발자
  • 임진욱
  • 타이포디자인연구소 대표이사
  • 2016.12.02.
  • 한글전각갤러리
  • 01:15:00
  • 김태수, 김태정, 장봉선, 최정순, 최정호
  • 글꼴, 나무체, 납활자, 디나루, 모리사와(モリサワ, Morisawa), 목판체, 문자판, 빅체(big체), 사진식자(寫眞植字), 세나루, 신그라픽, 원도(原圖), 장타이프, 제판기, 샤켄(写研), 전자식자(電子植字), 태그라피, 태나무, 태시스템, 태영화체, 폰트(font), 한겨레체, 한국 컴퓨터 그래피, 한국일보글꼴, 한글과컴퓨터, ᄒᆞᆫ글, 화고딕체, 화명조체, 활자, 태영화체, 폰토그래프(Fontograph), CTS(computerized typesetting system)

#01 초등학교 10리 길을 걸어서 등교, 가난했던 유년기

인터뷰에 응하는 김화복 디자이너. 갈색 외투와 하얀 셔츠를 입고 안경을 낀 모습. 어딘가를 응시하며 이야기하고 있다. 
“어릴 때는 갈대밭에서 뜸부기 알을 주워다가 삶아서 먹고 친구들하고 목욕도 하면서 지냈어요. 그 옛날에는 춥고 배고팠으니까. 그런 시절을 쭉 지내왔죠.””

김화복(1953년 출생)은 경상남도 김해 출신으로 어린 시절은 무척 배프고
가난한 시절이었는데 친구들과 갈대밭에서 뜸북이알을 줍고
밀가루 배급받았던 일 등을 이제는 즐겁게 회상할 수 있다고 하였다.
“어릴 때는 갈대밭에서 뜸부기 알을 주워다가 삶아서 먹고 친구들하고 목욕도 하면서 지냈어요.
그 옛날에는 춥고 배고팠으니까. 그런 시절을 쭉 지내왔죠.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지금부터 한 40년 이상 됐죠? 내가 69년도에 서울에 올라왔으니까.
그때만 해도 워낙 가난하던 시절이니까 초등학교도 10리 길을 걸어 다니고 그런 기억도 나요.”

#02 “이거 누가 썼나?” 한 마디에 한글 디자이너로

인터뷰에 응하는 김화복 디자이너. 좌측에 김 디자이너가 앉아있고, 우측에는 정장을 차려입은 면담자가 자리했다. 테이블 위에는 물컵과 장미꽃을 꼽은 화분이 놓여 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이거 누가 썼나?’ 사장님이 보게 된 거예요. 직원들이 저 꼬맹이가 썼다고 하니까 발탁이 돼서 그때부터 이제….””

당시 가난으로 인해 학교를 다닐 형편이 되지 못되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부모님 등 가족과 함께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다.
그리고 10대 후반에 장사타이프사에 입사하면서 인쇄, 출판과 관련된 일을 시작했다고 회고했다.
“그때 장파이프에 최정호 선생님이 계셨는데 최 선생님이 글자를, 원도를 써서 장사장님한테 주면
장사장님이 일본으로 보내고 일본 모리사와에서 문자판을 제작해서 한국으로 다시 수입을 한거죠.
근데 제가 소질이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글자를 보니까 워낙 이쁘게 만들고,
제가 저녁에 트레싱지에서 (글자를) 그려 봤어요.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이거 누가 썼나?’
사장님이 보게 된 거예요. 직원들이 저 꼬맹이가 썼다고 하니까 발탁이 돼서 그때부터 이제….”

#03 성서체부터 명조체까지, 장타이프에서의 한글 디자인

인터뷰에 응하는 김화복 디자이너. 좌측에 김 디자이너가 앉아있고, 우측에는 정장을 차려입은 면담자가 자리했다. 테이블 위에는 물컵과 장미꽃을 꼽은 화분이 놓여 있다.
“명조가 한 7가지 정도. 그리고 꼴도 7가지 정도 가는 것부터 굵은 것까지. 그 당시에 문자판도 열심히 만들고. 어쨌든 저는 장타이프에서 6~7년 동안 충성을 다해서 일을 많이 했죠.”

1969년부터 1975년 군대에 가기 전까지 장타이프사에서 일을 하였다.
처음에는 심부름부터 시작했으나 곧 장봉선 사장의 눈에 들어 장봉선 사장의 배려로
기술학원도 다니며 추후 한글 디자인까지 할 수 있었다고 말씀하셨다.
“그때 성서체를 많이 했죠, 성서. 기독교 성서공예 서체를 출판하고 식자기로,
식자로 해서 조판 편집, 인쇄까지 하고 납품하고 그랬으니까. 성서체는 많이 개발한 것 같아요.
그 다음에 그때 가로용 글자들도. (가로용 글자들이) 그때만 해도 명조꼴 밖에 없었으니까.
명조가 한 7가지 정도. 그리고 꼴도 7가지 정도 가는 것부터 굵은 것까지.
그 당시에 문자판도 열심히 만들고. 어쨌든 저는 장타이프에서 6~7년 동안 충성을 다해서 일을 많이 했죠.”

#04 알찬사 설립해 원도를 만들기 시작하다

인터뷰에 응하는 김화복 디자이너. 갈색 외투와 하얀 셔츠를 입고 안경을 낀 모습. 어딘가를 응시하며 이야기하고 있다. 
“나도 서체에 대한 일을 해 봐야 되겠다고 생각해서 알찬사를 설립을 하게 된 거예요. 설립을 해서 나름대로 제가 만든 글자를, 원도를 만들기 시작한 거죠.”

군대를 갔다온 후에는 정주기기에서 일을 하다가 20대 후반에
‘알찬사’에서 일을 하며 사진식자용판을 만들었다.
“…옛날을 생각해 보니까 집에서는 라면을 끓여 먹은 거예요.
그 당시에 라면도 고급음식에 들어갔지만. 그런 생활고 때문에 정주를 그만두고.
나도 서체에 대한 일을 해 봐야 되겠다고 생각해서 알찬사를 설립을 하게 된 거예요.
설립을 해서 나름대로 제가 만든 글자를, 원도를 만들기 시작한 거죠.”

#05 디지털 폰트의 매력에 “날아갈 듯” 하던 시절

인터뷰에 응하는 김화복 디자이너. 갈색 외투와 하얀 셔츠를 입고 안경을 낀 모습. 어딘가를 응시하며 이야기하고 있다. 
“좌우간 처음에는 날아갈 것 같더라고요. 막 금방금방 되니까, 내 마음대로 뜻대로 제작이 되니까.”

그리고 30대 후반에 김태정, 김태수 사장을 만나면서
태시스템을 만들고 책임디자이너로 일하게 된다.
“…디지털 폰트를 만들게 된 계기가 김태수 사장, 김태정 사장
그 양반을 만나서 컴퓨터 프로그램을 배우게 된 거죠.…(중략)…
그래서 폰토그래프라는 프로그램을 배워서 여태까지 400여 종을 만드는데.
수동으로 글자를 그릴 때는 상당히 시간이 많이 걸리는데 컴퓨터 폰트를 만들 때는 (금방 만드는 거죠).
좌우간 처음에는 날아갈 것 같더라고요. 막 금방금방 되니까, 내 마음대로 뜻대로 제작이 되니까.”

#06 대중의 반응에 자부심을 가지게 된 서체 개발

인터뷰에 응하는 김화복 디자이너. 갈색 외투와 하얀 셔츠를 입고 안경을 낀 모습. 어딘가를 응시하며 이야기하고 있다. 
“내가 만든 서체가 국민들한테 읽히고 하니까, 보람찬 일을 한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그것도 잠깐이죠. 세월도, 인생도 늙어 가듯이 금방 늙으니까.”

그는 400여종의 넘는 글꼴체를 개발하고 태나무체, 태영화체 등
다양한 서체를 개발하며 대중적인 사랑도 많이 받았다.
“…여러 가지를 만들다 보니까 대중들한테 반응이 된 거 같아요.
그래서 한글 번들로 들어가게 됐을 때, 저는 그때만 해도 자부심을 가졌죠.
내가 만든 서체가 국민들한테 읽히고 하니까, 보람찬 일을 한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그것도 잠깐이죠.
세월도, 인생도 늙어 가듯이 금방 늙으니까.”

#07 창작자에 대한 보호 장치 마련되길

인터뷰에 응하는 김화복 디자이너. 갈색 외투와 하얀 셔츠를 입고 안경을 낀 모습. 어딘가를 응시하며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 사람들은 메이저가 돼서 처음에는 실망감도 많이 느끼고 그랬어요.”

그는 한글 글꼴 역시 사람의 창작의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인데 무단복제되고
창작물로 인정하는 인식이 부족한 것이 아쉽다고 말하며 법적으로
이와 같은 것들이 보장되었으면 좋겠다는 말과 함께 사람들의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말을 강조하였다.
“열심히 개발을 해서 피땀 흘려서 만들어 놓으면 그것을 한 번에 복사를 해서
자기가 만든 양 취급을 하니까 열심히 일한 사람은 애만 쓰고
그런 사람들은 메이저가 돼서 처음에는 실망감도 많이 느끼고 그랬어요.
보호 장치를 만들어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보장을 받게끔 해주는 것도
앞으로의 목적이 돼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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