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8.제 96호 국립한글박물관 소식지 한박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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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조선말 큰사전 1’의 첫 장사진이 합성되어있다. 책의 오른쪽 장에 ‘조선어학회/ 지은/ 조선말 큰 사전/ 1/ ㄱ~깊’이 적혀있다. ‘조선말 큰사전’과 숫자 ‘1’은 빨간색으로 적혀있다. 그 아래에는 꽃무늬 기와 사진이 삽입되어있으며 페이지 하단에는 ‘을유 문화사’가 적혀있다. 배경은 옅은 미색 한지에 책을 중심으로 태극기의 ‘건곤감리’가 그려져 있다. 그 주변으로는 무궁화 꽃이 그려져 있다.

기획 기사

우리의 한글, 광복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일제강점기 시절(1910년 8월 29일~1945년 8월 15일)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본에 의해 한글을 쓰지 못하도록 탄압받았다.
그러나 선조들은 우리의 한글을 보호하고, 보급하고자 목숨을 내걸고 한글을 지켰다.
다가오는 8월 15일은 우리나라의 광복 76주년을 맞이하는 날이다.
선조들이 지켜낸 한글, 함께 되새겨 보자.

1913년부터 언급된 ‘한글’, 한글날의 시작인 ‘가갸날’

일제강점기 우리말을 위해 노력한 사람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은 주시경(1876~1914)이다. 그는 우리말과 글의 소중함을 일깨우며, 국어 문법에 대한 책을 펴낸 것은 물론 1908년 8월 31일 봉원사에서 30여 명의 국어강습소 졸업생과 국어 연구에 뜻이 있는 사람을 모아 ‘국어연구학회’라는 모임을 만든다. 허나 1910년 일제가 국권을 침탈하며 연구는 어려워진다. 또한 일제강점기에 ‘국어’라는 말은 우리말이 아닌 일본어를 뜻하는 상황이 되자 국어연구학회는 ‘한글모(한글을 연구하는 모임)’로 이름을 바꿔 활동을 이어간다.

1913년 한글모라는 모임을 통해 ‘한글’이란 표현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이듬해 주시경 선생이 3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면서 한글모의 활동이 점차 뜸해졌고, 1917년 중단된다. 하지만 주시경의 제자인 임경재, 최두선, 장지영 등이 이 불씨를 살려 1921년 ‘조선어연구회’를 만든다.

옛 신문 기사 내용의 일부. 가갸날이 반포된 것을 알리는 내용이 세로쓰기로 적혀있다.▲가갸날 기념식 기사
(출처: 조선일보 아카이브)
옛 신문 기사 사진. 흑백의 사진이 오래되어 인물을 알아보기 힘든 상태이다. 사진 속에는 넓은 공간에 긴 탁자가 놓여있고 많은 사람들이 탁자 앞에 앉아있다. 사진 하단에는 ‘가갸날잔치’가 역방향, 즉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적혀있다. 사진 왼쪽에는 기사 제목 ‘이 하늘과 이 따우에 거듭퍼진 「한글」의 빛’이 세로쓰기 되어있다. 그 왼쪽엔 작은 글씨로 ‘보배로운우리글을끗까지가려보자 우리글퍼진날을해맛도록잇지말자’가 적혀있고, 기념식 이름이 한자로 적혀있다. 제목과 글은 당시 맞춤법을 따라 쌍자음을 쓸 때, 앞 자음에 시옷이 사용되었다.▲가갸날 기념식 기사
(출처: 동아일보 아카이브)

조선어연구회의 업적 가운데 하나는 1926년 한글날의 시작인 ‘가갸날’을 제정한 것이다. 《훈민정음》이 완성됐다는 실록의 기록을 근거로 음력 9월 29일을 반포한 날로 삼아 11월 4일에 기념식을 거행했고, 한글을 배울 때 ‘가갸거겨’ 하면서 배운 것에 착안해 이름을 정했다. 더불어 1927년부터 잡지 ‘한글’을 간행했으며, 1929년 ‘조선어사전편찬회’를 구성해 국어사전 편찬에 착수하기도 했다. 조선어연구회는 1931년 ‘조선어학회’로 이름을 바꾼다. 학회는 1933년 한글맞춤법의 뿌리가 되는 ‘한글 마춤법 통일안’을 발표한 이후 표준말 제정, 외래어 표기법 통일 등의 연구를 계속 이어갔다. 참고로 가갸날은 1928년 ‘한글날’로 개칭됐고, 조선어학회는 1949년 ‘한글학회’로 이름을 바꿔 지금까지 한글을 위해 연구하고 있다.

낡고 오래된 한글 관련 자료. 겉표지에 제목 ‘한글’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적혀있다. 아래에는 한자로 된 목차가 세로쓰기 되어있다. 자료의 모서리는 낡아서 이리저리 헤졌다.▲한글 창간호
(한글사, 1927)
노랗게 바랜 종이에 ‘한글 맞춤법 통일안’이 적혀있다. 그 옆에는 ‘동아일보사’가 한자로 세로쓰기 되어있다. 그 외에도 알아보기 힘든 한문이 오른쪽에 세로쓰기 되어있다. 자료는 오른쪽모서리가 실로 엮여있다.▲한글 마춤법 통일안
(조선어학회, 1933)
‘한글 맞춤법 통일안’ 개정판 표지. 갈색으로 빛바랜 책 표지에 제목 ‘한글 맞춤법 통일안’이 적혀있다. 그 아래에는 알아보기 힘든 한자가 적혀있으며 표지 중앙에 ‘[고친판]/五 판’이라고 적혀있다. 표지 하단에는 ‘조선어학회’가 적혀있다.▲한글 마춤법 통일안
(조선어 학회, 1937)

(출처: 국립한글박물관 e뮤지엄)

잊을 수 없는 조선어학회 사건, 그리고 광복

일제는 우리나라를 압박하기 위해 1936년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을 공포한다. 3년 뒤 일제는 학교의 국어 과목을 없애고, 각 신문·잡지를 폐간해간다. 1941년 일제는 추가로 ‘조선사상범 예방구금령’을 선포하는데 조선어학회의 활동이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한글 사용 금지 규정을 어겼다는 이유로 1943년 4월까지 총 33명의 학자들을 체포해 구금하기에 이른다. 그 결과 학자 대부분 일제 경찰에 취조를 받거나 모진 고문 등을 당하기도 했다.

구금된 조선어학회 학자들은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함께 석방되었다. 혹독한 수감 생활을 견디고 온전치 않은 상태에서도 학자들은 한글을 알려야 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조선어학회를 재건하는 데 힘을 쏟는다. 해방 3개월 뒤 ‘한글 첫 걸음’을 개발해 전 국민을 대상으로 초중등 수준의 한글을 익힐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특히 체포 당시 압수돼 행방불명이었던 초고 2만6,500여 장으로 된 ‘조선말 큰사전’의 원고를 경성역 창고에서 찾아 1947년 한글날에 ‘조선말 큰사전’ 1권을 출판할 수 있었다.

책 ‘조선말 큰사전 1’의 첫 장. 오른쪽 장에 ‘조선어학회/ 지은/ 조선말 큰 사전/ 1/ ㄱ~깊’이 적혀있다. ‘조선말 큰사전’과 숫자 ‘1’은 빨간색으로 적혀있다. 그 아래에는 꽃무늬 기와 사진이 삽입되어있으며 페이지 하단에는 ‘을유 문화사’가 적혀있다.▲ 조선말큰사전 1 (초판본) 책 ‘조선말 큰사전 2’의 첫 장. 오른쪽 장에 ‘조선어학회/ 지은/ 조선말 큰 사전/ 2/ ㄴ~ㅁ’이 적혀있다. ‘조선말 큰사전’과 숫자 ‘2’는 빨간색으로 적혀있다. 그 아래에는 꽃무늬 기와 사진이 삽입되어있으며 페이지 하단에는 ‘을유 문화사’가 적혀있다.▲조선말큰사전 2 (초판본)

(출처: 국립한글박물관 e뮤지엄)

“말은 사람의 특징이요, 겨레의 보람이요, 문화의 표상이다.
조선 말은 우리 겨레가 반만년 역사적 생활에서 문화 활동의 말미암던 길이요 연장이요 또 그 결과이다.
그 낱낱의 말은 다 우리의 무수한 조상들이 잇고 이어 보태고 다듬어서 우리에게 물려 준 거룩한 보배이다.
그러므로 우리말은 곧 우리 겨레가 가진 정신적 및 물질적 재산의 총목록이라 할 수 있으니
우리는 이 말을 떠나서는 하루 한때라도 살 수 없는 것이다.”

- ‘우리말 큰사전(1947)’ 머리말 中 -

‘한글 첫 걸음’ 표지. 붉은 갈색으로 빛바랜 표지에 ‘한글 첫 걸음’이 적혀있다. 그 아래에는 ‘조선어학회 지음’이 적혀있으며 표지 하단에는 ‘군정청/ 학무국’이라고 적혀있다. 글씨체는 붓글씨체와 비슷하다.▲한글 첫 걸음
(군정청 학무국, 1945)
(출처: 국립한글박물관 e뮤지엄)

광복 후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한글날이 양력 10월 9일로 지정됐으며, 2006년 국경일이 되었다. 더불어 1962년 ‘훈민정음 해례본’은 국보 제70호로 지정되었고 1997년 10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됐다.

김구(1876~1949) 선생은 광복 이후 ‘새로 만들어지는 우리나라에서 오직 한없이 갖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라고 말했다. 이런 열망을 바탕으로 우리 한글은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를 아우르는 문화가 됐고, 더 발전하고 있다. 이런 역사를 기억하면서 이번 광복절에는 선조들이 일제에 맞서 지켜낸 한글의 의미를 다시금 되새겨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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