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1. 제64호국립한글박물관 소식지

한글 나누기 2

우리말을 지킨 독립운동가
신명균 · 이윤재

글. 박용규 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

우리말은 공기와 같다. 사람이 산소를 들이마시지 못하면 죽는 것과 같이, 제 말을 하지 못하고 산다면 살아도 제대로 살고 있다고 할 수 없다. 산소와도 같은 우리말의 소중함을 모르고 살아서야 되겠는가? 선진국은 제 말과 제 글을 소중히 여긴다. 선진국의 문턱에 들어간 우리나라 국민들 가운데 아직도 우리말 대신에 외국어인 영어를 즐겨 사용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분들이 있다. 제 나라 국민들과 대화를 할 때에는 제 나라말을 써야 소통에 지장이 없다. 우리나라 사람들끼리 말을 할 때에는 우리말을 써야 한다. 이것은 독립국가 국민의 기본자세이다. 영어를 써서 말을 해야 할 경우는 영어를 쓰는 나라의 사람들과 대화를 할 때다.

제 나라의 말과 제 나라의 글을 쓰는 일은 나라와 민족을 유지하는 지름길이다. 우리의 경우 제 나라의 말은 한국어이고, 제 나라의 글은 한글이다. 우리말인 한국어와 우리글인 한글이 침략자에게 빼앗긴 시기가 있었다. 일제강점기였다. 일제는 우리의 국토와 주권을 강탈하였고, 우리 민족을 노예로 만들었다. 일제는 조선을 지배하며 일본어를 국어로, 일문을 국문으로 정하여 강제로 보급하였다. 그들은 일본어 보급을 통해 한민족을 일본인으로 동화시키고자 하였다.

일제는 조선을 지배하면서 민족 말살 차원에서 조선어를 짓밟는 정책을 폈다. 이에 맞서 조선어 학회의 핵심 인사들은 조선어와 한글을 지켜 우리 민족과 민족성을 영구히 유지하는 언어 독립 투쟁을 전개하였다. 조선어 학회의 인사들은 우리 말글이 침략자들에 의해 짓밟히는 것을 보고 목숨을 걸고 맞서 싸웠다.

조선어 학회의 한글 운동이 언어 독립 투쟁임을 알아차린 일제는 1942년 10월 1일 조선어 학회 사건을 일으켰다. 조선어 학회의 회원 33명을 검거하여 탄압하였던 것이다. 일제는 조선어 학회의 인사들을 치안 유지법 위반으로 처벌하였다. 일제의 가혹한 고문으로 인해 목숨을 잃은 조선어 학자도 적지 않았다. 이 글에서는 조선어 학회의 핵심 인사였던 신명균·이윤재의 활동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신명균(申明均, 1889∼1941)신명균은 일제의 조선어 말살에 맞서 언어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는 조선어 연구회와 조선어 학회(2대 간사장, 3대 간사)에서 조선어 철자법 제정 위원으로써 <한글 맞춤법 통일안> 완성에 기여하였고, 표준어 사정 위원으로 활동하여 표준어의 제정에 도움을 주었다. 조선어 문법의 통일에 기여하고자 ≪조선어문법≫(1933)을 저술하였으며,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대중에게 널리 소개하고자 하여 ≪조선어철자법≫(1934)을 저술하였다. 조선어 학회의 기관지 ≪한글≫을 편집하고 간행하는 업적도 남겼다. 아울러 1929년에 출범한 조선어사전편찬회에서 상임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이극로, 이윤재, 최현배와 함께 조선어 학회의 핵심 인물이었다.

한편 그는 ≪한글역대선≫(1933), ≪주시경선생유고≫(1933), ≪조선문학전집 제1권-시조집≫1(1936), ≪조선문학전집 제2권-가사집≫(1936), ≪조선문학전집 제5권-소설집≫1(1936), ≪조선문학전집 제6권-소설집≫2(1937) 등을 발간하여 민족 문화를 보존하고 집대성하였다. 이러한 그의 활동은 ‘조선어 학회 사건’ 예심 판결문(1943)에 상세히 나와 있다. 그가 일제에 맞서고자 자결하지 않았다면, 최현배처럼 징역 4년 형을 선고받았을 것으로 필자는 판단한다. 신명균은 일제의 우리말 말살과 일본식 성명 강요에 맞서 1940년 11월 20일 스승 나철 선생의 사진을 품은 채로 자결하였다.

신명균 선생의 사진▲ 신명균 선생의 사진

 

필자는 2017년 광복절에 항일 투사 신명균 선생에게 건국 훈장 애국장을 추서받게 하였다. 2016년 3월에 국가 보훈처에 대일 항쟁기 조선어 학회 간사장을 역임한 신명균 선생에게 대한민국 정부가 독립 유공 훈장을 수여하도록 공적 조사서를 제출하였다. 1차에서 탈락하자 다시 재심을 신청하였는데, 2017년 보훈 심사에서 통과하였다. 2017년 8월 30일 백범김구기념관 컨벤션홀에서 열린 신명균 선생 포상 전수식에 신명균 선생 유족과 함께 참석하였다.

2017년 8월 30일. 신명균 선생 포상 전수식을 마치고(왼쪽부터 조선어 학회 선열 유족회 신광순 회장, 신명균 선생 조카님들, 필자)▲ 2017년 8월 30일. 신명균 선생 포상 전수식을 마치고
(왼쪽부터 조선어 학회 선열 유족회 신광순 회장, 신명균 선생 조카님들, 필자)

 

이윤재(李允宰, 1888∼1943)이윤재는 마산의 창신학교와 영변의 숭덕학교에서 국어와 국사를 가르쳤고, 세 차례의 옥고(3·1운동 참여로 1년 6개월간 평양 감옥 생활,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1년간 서대문형무소 생활, 조선어 학회 사건으로 투옥)를 치렀다. 끝내 함흥형무소에서 고문의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순국하였다. 이윤재는 한글 운동의 핵심 인물로서 조선어 연구회와 조선어 학회에서 활동하였다. 조선어 학회의 한글 운동은 민족어의 규범을 수립하고자 하였다. 한글 맞춤법의 통일, 표준어의 사정(査定), 외래어 표기법의 제정이 민족어 규범 수립 운동에 해당한다.

동우회 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시기의 이윤재▲ 동우회 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시기의 이윤재

 

첫째로, <한글 맞춤법 통일안>의 제정에 참여하였다. 이윤재도 1930년부터 조선어 학회가 추진한 <한글 맞춤법 통일안>의 제정 위원, 수정 위원, 정리 위원으로 3년간 활동하였다. 둘째로, 조선어 표준어 사정 작업에 참여하였다. 1935년 1월 조선어 학회가 조선어의 표준어를 사정할 때 사정 위원과 수정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셋째로, ≪한글≫지의 편집과 발행을 담당하여 민족어 규범 수립에 기여하였다. 1934년 4월(11호)에서 1937년 5월(45호)까지 이윤재가 ≪한글≫의 편집을 맡아 발행하였다.

조선어 표준어 사정회 제3독회 기념사진(앞줄 오른쪽부터 한징, 이극로, 이윤재, 이중화, 두 사람 건너가 이희승. 이희승 바로 뒤가 최현배. 가장 뒷줄 왼쪽이 김윤경. 인천 제일 공립 보통학교에서 1936년 7월 31일 촬영. 사진 제공 : 신현모의 아들 신광순)▲ 조선어 표준어 사정회 제3독회 기념사진
(앞줄 오른쪽부터 한징, 이극로, 이윤재, 이중화, 두 사람 건너가 이희승. 이희승 바로 뒤가 최현배. 가장 뒷줄 왼쪽이 김윤경.
인천 제일 공립 보통학교에서 1936년 7월 31일 촬영. 사진 제공 : 신현모의 아들 신광순)

 

다음으로 이윤재는 16만 어휘에 달하는 우리말의 뜻풀이를 제대로 한 ≪민족어대사전≫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는 조선어사전편찬회 조직 이후 1930년에서 1931년까지, 그리고 1936년에서 1937년 6월 수양동우회 사건 발생 전까지 조선어 학회의 조선어 사전 편찬에 전임 위원으로 참여하였다. 조선어 사전 편찬이 독립운동이라는 주장은 이윤재의 주장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윤재는 지방에서 찾아온 청년들에게 늘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말과 글은 민족과 운명을 같이한다. 일본이 조선의 글과 말을 없애 동화 정책을 쓰고 있으니 우리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우리글과 우리말을 아끼고 다듬어 길이 후세에 전해야 한다. 말과 글이 없어져 민족이 없어진 가까운 예로 만주족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우리의 말과 글에 대한 글을 써 두고 조선어 사전을 편찬해 두면, 불행한 일이 있더라도 후에 이것을 근거하여 제 글과 말을 찾아 되살아날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민족의 말과 글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은 나라를 사랑하는 길이 되고 또 민족 운동이 되는 것이다.”

이윤재는 조선어 사전을 편찬해 두면, 이것에 근거하여 우리 민족이 제 글과 말을 찾아 되살아날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이처럼 이윤재에게 한글 운동은 민족 운동 즉 독립운동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이윤재가 조선어 학회의 동지들과 함께 언어 독립운동인 한글 운동을 전개하자, 일제는 1942년 조선어 학회 사건을 일으켜 탄압하였다. 이윤재는 1942년 10월 함남 홍원경찰서에 갇혀 일제 형사들로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매질을 당한 것도 모자라 6번의 물고문을 당했다. 그 후 함흥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일제의 고문 후유증으로 말미암아 결국 그는 1943년 12월 8일 감옥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의 나이 56세였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그에게 건국 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일제의 패망은 우리 민족의 해방을 가져왔다. 동시에 일제의 패망은 조선말과 한글의 해방을 불러왔다. 우리 민족이 일제가 강요한 일본 말과 일본 글의 쇠사슬에서 벗어났다는 점에서도 8·15 해방의 의미는 너무도 컸다. 현재 우리 민족의 경우 남북으로 국토·국가·민족이 분단되어 있지만, 참으로 다행인 점은 언어가 분단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일제 강점기 때 이윤재·신명균·최현배·이극로를 포함한 국어학자들이 목숨을 바쳐 우리 말글을 연구하고 지켜냈기에, 언어의 분단을 막을 수 있었다. 애국지사들의 우리 말글 사랑과 민족 사랑의 가르침을 계승하여, 남북의 동포가 함께 우리말 연구를 심화하고, 민족의 평화와 번영을 앞당기는 데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박용규 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

박용규 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
박용규는 고려대학교 대학원 사학과에서 한국근대사를 전공하여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와 우리말로 학문하기 모임의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북으로 간 한글운동가 이극로 평전≫(2005), ≪조선어학회 항일 투쟁사≫(2012), ≪조선어학회 33인≫(2014)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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