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공감
반갑습니다

동시대적 감각을 더한 한글, 패션의 언어로 풀어내다
르쥬(LEJE) 강주형, 제양모

블랙핑크 제니의 ‘MMA 2025’ 무대가 끝난 뒤, 한국적 아름다움을 드러낸 그의 무대의상이 큰 화제를 모았습니다. 『청구영언』의 구절이 새겨진 15미터에 달하는 베일부터 ‘제니’라는 이름이 한글로 새겨진 재킷까지, 화려한 무대 위에서 한글은 또 하나의 주인공이 되어 존재감을 드러냈는데요. 이번 호에서는 그 의상을 직접 기획하고 제작한 주인공 패션 브랜드 르쥬(LEJE)의 강주형, 제양모 디자이너를 만나, 제니 무대의상 제작 과정과 한글을 바라보는 시선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제니와 르쥬(LEJE)
한글로 견고하게 엮어낸 자신의 정체성

<한박웃음> 독자들에게 인사와 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저희는 브랜드 르쥬(LEJE)의 디자이너 강주형, 제양모입니다. ‘LEJE’는 프랑스어로 ‘The I’, 즉 ‘자아’를 뜻합니다. 한국의 장인정신에 뿌리를 둔 수공예에 동시대적 시각을 더한 브랜드로, 과거와 미래를 잇는 예술성, 실험정신, 그리고 지속 가능성이 조화를 이루는 새로운 럭셔리를 제안하고 있습니다.
어두운 배경 앞에서 르쥬의 강주형, 제양모 디자이너가 나란히 앉아 있다.

최근 블랙핑크 제니의 ‘MMA 2025’ 무대의상을 디자인해 주목받았습니다. 협업 계기와 작업 과정이 궁금합니다.

제니 씨로부터 ‘MMA 2025’ 무대 의상 디자인 협업 제안을 받으면서 이번 프로젝트가 시작됐습니다. 이번 무대는 제니 씨가 한국에서 오랜만에 서는 자리였던 만큼, 한국 팬들을 위한 하나의 ‘선물’ 같은 무대를 만들고 싶다는 뜻을 먼저 전해주셨습니다. 저희 역시 그 마음에 공감하며 협업을 준비했습니다.

무대의 전반적인 콘셉트에는 지난해 한글날 제니 씨가 개발한 한글 폰트 ‘젠 세리프(ZEN SERIF)’ 프로젝트가 중요한 영감으로 작용했습니다. 르쥬(LEJE)는 한국 전통 요소를 동시대적으로 재해석하는 작업을 지속해 왔고, 제니 씨 또한 블랙핑크 활동을 비롯해 문화적 정체성을 현대적인 방식으로 풀어내는 시도를 꾸준히 이어왔습니다. 이러한 공감대를 바탕으로 생각하다 보니, 기존의 한복이나 전통 이미지를 그대로 사용하기보다, 새로운 방향에서 출발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 과정에서 한글이라는 언어가 지닌 구조적 아름다움과 정체성이 자연스럽게 떠올랐고, 이를 이번 무대의상의 핵심 주제로 삼게 됐습니다.
2025 MMA 블랙핑크 제니의 무대 사진이다. 넓은 무대 중앙에 높은 구조물이 세워져 있고, 그 위에 ‘청구영언’이 새겨진 15미터 길이의 베일을 입은 제니가 서 있다.

▲ 2025 MMA 무대 속 블랙핑크 제니 (출처: Melon)

제니가 착용한 15미터 길이의 베일에는 『청구영언』의 구절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청구영언』을 선택하신 이유와, 작업 시 고려한 점은 무엇인가요?

제니 씨의 첫 등장 장면이었던 만큼, 단순한 장식이나 의미 없는 문구보다 한글의 정체성과 서사를 담은 문장을 담고 싶었습니다. 국내외에서 상대적으로 덜 소개된 텍스트를 무대 위에서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에 여러 자료를 검토했고, 그렇게 국립한글박물관 소장품 『청구영언』을 알게 됐습니다.

『청구영언』은 한글로 기록된 최초의 노래 가사집이라는 점에서 ‘노래’와 ‘무대’라는 형식과 본질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느꼈습니다. 음악이 흐르는 무대 위에서, 노래의 언어가 시각적 언어로 펼쳐진다는 점이 이번 무대와 매우 상징적으로 맞닿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청구영언』에 수록된 여러 구절 중, 한자와 한글이 병기된 부분을 중심으로 신중하게 선별했습니다. 한자가 주가 되는 문장보다는, 한글의 초기 형태가 지닌 조형적 아름다움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구성을 중요하게 봤습니다.
‘청구영언’ 본문 사진이다.

▲ 『청구영언』김천택 편, 1728년, 국립한글박물관 소장

‘청구영언’이 새겨진 15미터 길이의 베일 사진이다. 흰색 베일에 붓으로 쓴 것 같은 ‘청구영언’의 가사말이 새겨져 있다.

▲ 『청구영언』의 구절이 새겨진 15미터 길이의 베일

‘청구영언’ 본문 사진이다.
‘청구영언’이 새겨진 15미터 길이의 베일 사진이다. 흰색 베일에 붓으로 쓴 것 같은 ‘청구영언’의 가사말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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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개의 ‘제니’라는 이름을 한글로 새긴 자켓도 화제였습니다. 기획 의도와 제작 과정이 궁금합니다.

해당 재킷은 마지막 무대를 장식하는 의상이었던 만큼, 강한 메시지를 담되 무대 전체와 조화를 이루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이에 색이나 형태보다는, 언어와 반복을 통해 존재감을 드러내는 방식에 집중했습니다.

‘Like Jennie’라는 곡이 하나의 이름을 다양한 발음과 뉘앙스로 풀어내듯, ‘제니’라는 이름이 지닌 한글의 조형적 아름다움과 유연함에 주목했습니다. ‘제니’, ‘죄니’처럼 반복되고 변주되는 이름은 한글이 가진 리듬과 확장성을 보여준다고 느꼈습니다. 이를 하나의 화면을 이루는 방식으로, 제니라는 존재를 시각적으로 강조하고자 했습니다.

기획 단계에서는 최근 금박장과 협업했던 경험을 좀 더 현대적으로 확장하고자 했습니다. 프린트가 아닌 전통 금박 공정과 동일한 과정으로 작업이 진행됐으며, 모든 글자를 하나하나 아교로 찍은 후 은박을 올려 두드리고, 다시 건조하는 과정을 반복해 완성했습니다.

마무리 단계에서는 은박이 떨어지지 않도록 충분히 건조한 후, 얇은 시퀸(금속 또는 합성수지로 만든 얇은 장식 조각)을 한 겹 더 꿰매 고정했습니다. 수많은 반복과 시간이 축적된, 매우 고된 작업이었지만, 그만큼 장인정신과 집중력이 고스란히 담긴 결과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재킷은 단순한 의상을 넘어, 이름과 언어, 그리고 존재를 기리는 하나의 무대 장치로 완성되기를 바랐습니다.
‘제니’라는 이름이 한글로 적힌 재킷을 입은 제니 사진이다.
‘제니’ 이름을 금박장에 새긴 재킷이다.
금박장인이 금박장에 제니의 이름을 새기고 있다.

▲ ‘제니’의 이름을 금박장 기법으로 새긴 재킷

‘제니’라는 이름이 한글로 적힌 재킷을 입은 제니 사진이다.
‘제니’ 이름을 금박장에 새긴 재킷이다.
금박장인이 금박장에 제니의 이름을 새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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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의상에 적용한 한글 서체는 어떤 기준으로 선정하셨나요?

베일에 새겨진 『청구영언』의 서체는 원본이 지닌 조형적 특징과 역사적 맥락을 훼손하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한 기준이었습니다. 해당 텍스트는 그 자체로 문화·사료적 가치가 높고, 이번 무대에서도 한글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핵심 장치로 사용됐기 때문에 불필요한 해석이나 논란의 여지를 만들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에 원본에 사용된 서체의 인상과 구조를 최대한 충실하게 구현하는 방향을 선택했습니다.

재킷 장식에 사용된 ‘제니’ 서체는 오에이 엔터테인먼트와 협업해 제작됐습니다. 실제 도장을 만들어 제작했기 때문에 전통 도장에 쓰이는 여러 서체를 참고했고, 그중 ‘제니’라는 이름이 가장 자연스럽게 읽히는 서체를 골랐습니다. 또한, 전통적인 인상과 현대적인 무대 맥락이 공존할 수 있도록 균형을 고려했습니다.

두 디자이너님께서 바라보시는 한글의 디자인적 아름다움, 또는 한글만이 지닌 특별한 매력은 무엇인가요?

한글은 문자 자체가 소리의 원리를 바탕으로 구조적으로 설계된 언어이기 때문에, 조형적인 관점에서 매우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하나의 완성된 단어가 아니더라도, 자음과 모음의 배열만으로도 리듬과 균형이 살아 있습니다.

해외 디자이너들이 의미가 완전히 전달되지 않는 단어나 문자를 시각 요소로 사용하는 사례를 종종 보게 되는데, 그 역시 언어가 가진 구조적 아름다움 때문이라고 느낍니다. 한글은 의미를 넘어 형태 그 자체로도 강한 시각적 힘을 지닌 문자이며, 그 점이 패션의 소재로 활용될 때 특히 매력적으로 작용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글은 우리의 생각과 정체성을
정밀하게 담아내는 그릇이자,
더 멀리 나아갈 수 있게 해주는 언어

한국 전통 요소에 관심을 가지게 된 배경과 이를 패션으로 풀어낼 때, 특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저희는 해외에서 오랜 시간 공부하고 작업해 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값진 경험도 많이 쌓았지만, 결국 가장 중요하다고 느낀 것은 ‘나만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이었습니다. 파리의 여러 하우스 브랜드에서 근무하며 느낀 점은 각 브랜드와 디자이너가 자신이 가진 정체성을 분명히 인식하고, 그것을 지키면서도 동시대적으로 잘 활용한다는 점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장인의 손길이 담긴 수공예 작업에 꾸준히 관심을 가져온 것도 이러한 방향에 자연스럽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전통 요소를 패션으로 풀어낼 때 특정한 기준이나 규칙을 엄격하게 정해두지는 않으려 합니다. 제약을 두기보다는 오히려 전통이 하나의 언어처럼 자연스럽게 작동하는지를 중요하게 봅니다. 형식에 얽매이거나 억지로 전통성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 현재의 감각 속에서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는지, 그리고 오늘의 옷으로 설득력을 가지는지를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생각합니다.
왼쪽에는 불국사 석가탑이 있고, 오른쪽에는 불국사 석가탑의 구조적 균형미에 영감받은 미니 드레스가 있다. 드레스 중앙을 일부 잘라내 석가탑 모양으로 만들었다.

▲ 불국사 석가탑의 구조적 균형미에 영감받은 미니 드레스

왼쪽에는 반가사유상이 있고, 오른쪽에는 반가사유상 복식에서 영감을 받은 구조적인 어깨 라인의 가운이 있다.

▲ 반가사유상 복식에서 영감을 받은 구조적인 어깨 라인의 가운

왼쪽에는 불국사 석가탑이 있고, 오른쪽에는 불국사 석가탑의 구조적 균형미에 영감받은 미니 드레스가 있다. 드레스 중앙을 일부 잘라내 석가탑 모양으로 만들었다.
왼쪽에는 반가사유상이 있고, 오른쪽에는 반가사유상 복식에서 영감을 받은 구조적인 어깨 라인의 가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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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한글’을 주제로 새롭게 시도해 보고 싶은 프로젝트나 이루고 싶으신 꿈이 있다면 소개 부탁드립니다.

거창한 프로젝트나 특정한 목표를 염두에 두고 있다기보다는, 한글이 자연스럽게 일상과 패션 안에서 사용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더라도, 한글이 누구나 가볍게 즐기고 각자의 방식으로 풀어낼 수 있는 언어로서 존재했으면 좋겠습니다. 한글이 ‘설명해야 하는 소재’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쓰이고 받아들여지는 디자인의 한 요소로 자리 잡는 것, 그것이 앞으로 이루고 싶은 가장 큰 바람입니다.

마지막으로 두 디자이너님께 ‘한글’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저희에게 한글은 단순한 장식이나 소재가 아니라, 이야기를 가장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 언어입니다. 의상은 겉으로 보기에 아름다운 결과물일 수 있지만, 그 안에는 아티스트와 저희가 함께 고민하고 선택해 온 과정과 감정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작업의 결과뿐 아니라, 그 과정과 서사를 함께 나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무대 위에서 의상은 하나의 장치로 기능하고, 그 의미가 이해될 때 비로소 무대 전체가 완성된다고 느낍니다. 특히 이번 무대에서는 더 많은 이야기를 담고 싶었고, 그 이야기를 가장 섬세하게 풀어낼 수 있는 언어가 한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한글은 우리의 생각과 정체성을 정밀하게 담아낼 수 있는 동시에 우리를 특정한 틀 안에 가두기보다는 더 멀리 나아갈 수 있게 해주는 언어입니다. 그런 점에서 한글은 저희에게 과거를 설명하는 도구이자, 앞으로의 가능성을 확장해 주는 매개라고 생각합니다.

<사진 출처: 르쥬(LEJ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