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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전시 사진. 연한 파란색 하늘을 배경으로 전통 문양을 닮은 흰 구름이 흩어져 있다. 화면 왼쪽에는 태극기를 든 남자아이가 웃으며 서 있고, 그 앞에는 흰 저고리와 검은 치마를 입은 젊은 여성이 두 손을 모은 채 감동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 옆에는 흰색 한복을 입은 할아버지가 온화하게 미소 짓고 있으며, 그 오른쪽에는 갈색 정장을 입은 중년 남성이 아기를 안고 태극기를 든 채 서 있다. 가장 오른쪽에는 나이가 지긋한 남성이 어린 여자아이에게 무궁화꽃을 건네고 있고, 여자아이는 분홍색 꽃을 두 손으로 받으며 활짝 웃고 있다.  사진 왼쪽 하단에는 하늘색 박스 안에 ‘기획기사’ 문구가 적혀있다. 그 아래에는 기사의 제목 ‘『해방기념시집』 다시 찾은 한글로 노래한 광복의 기쁨’이 쓰여있다.
기획 기사
『해방기념시집』
다시 찾은 한글로 노래한 광복의 기쁨
기획 기사

『해방기념시집』
다시 찾은 한글로 노래한 광복의 기쁨

갈색 배경지에 이희승의 시 ‘榮光(영광)뿐이다’ 전문이 적혀있다. 八月(팔월) 보름날 저들의 霹靂(벽력)이 / 우리에게는 自由(자유)의 鍾(종)이였다 / 太陽(태양)을 다시 보게 되도다 / 오 이게 얼마만이냐 / 잃어버린 입을 도루 찾아 / 마음대로 혀가 돌아가노나 / 두 발에 足鎖(족쇄)를 부셔버리고 / 뛰거니 닫거니 날듯하여라 / 고랑 벗어버린 두 손에는 / 기운차게 기ㅅ발이 퍼더거린다 / 萬歲(만세)ㅅ소리에 땅이 터질 듯 / 눈에 보이느니 타오르는 氣槪(기개) / 얼마나 그리웠던가 저 蒼空(창공) / 껴안고 싶은 / 아름다운 江山(강산) / 무서운 煉獄(연옥) 속의 三十六年(삼십육년)ㅅ동안 / 苦難(고난)의 試驗(시험)을 훌륭히 치뤘다 / 왜 이것이 偶然(우연)이냐 / 깊은 까닭과 큰 原因(원인)이 있다 / 그렇다 原因(원인)과 까닭이 있으니 / 앞날은 반드시 / 榮光(영광)뿐이다

광복 80주년, 해방의 기쁨을 노래한 시

올해는 광복 8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국립한글박물관은 소장품 중에서 독립의 기쁨을 노래한 『해방기념시집』(1945)을 소개하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되찾은 우리글로 쓴 시를 감상하며 광복의 감격을 함께 나누어 보았으면 합니다.

‘해방기념시집’ 표지 사진이다. 바랜 종이 색깔과 질감이 오래된 책이라는 인상을 준다. 표지 왼쪽 아래에는 붉은 도장이 찍혀 있다.▲ 『해방기념시집』 표지

‘해방기념시집’ 김환기 장정 페이지가 펼쳐져 있으며, ‘해방기념시집’이라는 제목과 함께 작은 삽화, 그리고 하단에 출판 정보가 인쇄되어 있다.▲ 『해방기념시집』 김환기 장정

『해방기념시집』은 해방 후 처음 발간된 기념시집입니다. 나라를 되찾은 그해, 1945년 12월 12일에 출간되었습니다. 이 시집에는 24명의 문인이 해방을 주제로 쓴 시 1편씩, 총 24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서문은 평론가 이헌구(1905~1983)가 썼습니다. 그는 서문에서 해방의 역사를 기념하고 새로운 시가의 지표를 세우고자 한다고 시집의 발간 목적을 밝혔습니다. 시집은 전체 97면이며 당시 가격은 15원입니다. 광복 기념으로 출시됐던 국내 최초의 담배 ‘승리’의 가격이 3원, 당시 쌀 한 가마니가 60원이었다고 하니 시집 가격을 대략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시집의 장정은 화가 김환기(1913~1974)가 맡았습니다. 간행을 맡은 중앙문화협회는 문인, 화가, 언론인, 교육자 등이 모여서 1945년 9월 18일에 창립한 문화예술단체입니다. 회원은 변영로, 오상순, 김영랑, 양주동, 김환기 등 30여 명입니다.

‘해방기념시집’의 수록 시인과 작품이 표 형태로 정리되어 있다.

『해방기념시집』에서 24인은 일제치하와 광복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았을까요? 이 시집의 첫 시는 정인보의 「十二哀(십이애)」입니다. 이상설, 박은식, 한용운 등 해방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신 12인을 추모하는 노래입니다. 시집 참여자들은 일제강점기를 “압박과 유린과 희생에 무친 삼십육년”(김광섭),“벙어리 된 지 서른여섯 해”(박종화)로 기억하고 기록합니다. 이런 시절을 겪은 후 맞이한 해방을 “이것이 꿈인가?/생시라도 꿈만 같다”(홍명희), “감격에 막히면/ 아 언어도 소용없고나”(오장환)와 같이 주체할 수 없는 환희의 사건으로 묘사했습니다. 해방을 ‘님의 귀환’이라는 은유로 표현하며, “정녕 뵈왓고나/ 님을 다시 뵈왓고나”(양주동), “고흔 선물 실고 임은 도라오셔라”(이흡)라고 노래합니다. “낡은 터를 닦고/ 새집을 이룩하자”(이병기)와 같이 새 나라 건설에 대한 기대와 열망도 담았습니다.

이 시집은 분량이 적고, 시인들의 성격이 각기 다른 데다 단순하고 상투적인 어조로 해방의 기쁨을 노래했다는 이유로 큰 주목을 받지 못했습니다. 반면, 되짚어볼 만한 여러 가지 의미도 있습니다. 우선, 『해방기념시집』은 광복 후 처음 간행된 기념시집입니다. 갑작스러운 해방 앞에서 문인들은 공동시집을 활발하게 출간했습니다(『삼일기념시집』, 『횃불』, 『날개』). 그에 앞서 『해방기념시집』은 가장 먼저 해방의 체험을 시로 재현하고 기념하는 방법을 공식화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해방기념시집』은 좌파와 우파를 넘어선 이념의 자율성을 보여주는 시집으로 꼽힙니다. 해방 직후 이념대립으로 분화되기 전에 시집이 간행되었으므로 좌우익 시인들의 작품이 다양하게 실려 있습니다. 이념적 차이보다 민족문화가 우세했던 해방 직후의 모습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직설적으로 해방의 환희를 노래하는 모습에서 지나친 감정의 과잉도 논의 되지만, 오히려 이점 때문에 당대 분위기를 가장 잘 드러내는 대표 시집으로 평가받습니다.

“앞날은 반드시 영광뿐이다!”, 이희승

끼익 덜컹! 1945년 8월 17일 오후, 활짝 열린 함경남도 함흥형무소 철문,
피멍투성이 미라 같은 모습, 절뚝절뚝 서로를 부축하며 나오는 죄수들!


이들은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모진 옥고를 치르다 풀려난 학회 회원들이었습니다. 이날 풀려난 이희승 선생님은 광복의 벅찬 감격과 기쁨을 <영광뿐이다>라는 시에 생생하게 담았는데요. 국어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이희승을 소개합니다.

1935년 조선 표준어사정위원회 때의 조선어학회 학자들의 흑백사진이다. 여러 명의 학자가 세 줄로 서서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1935년 조선 표준어사정위원회 때의 조선어학회 학자들,
둘째 줄 오른쪽 세 번째 안경 쓴 사람이 이희승 (출처: 한글학회)

일석 이희승 선생의 흑백 사진이다. 노년의 이희승 선생이 미소를 짓고 있다.▲ 일석 이희승 선생 (출처: 일석학술재단)

대학생 때부터 조선어학회 활동에 적극 참여했던 선생님은 졸업 후 간사가 되어 중추적인 책임을 맡게 됩니다. 당시 학회는 우리말 사전 편찬을 핵심 사업으로 정하고, 사전 편찬을 위한 기초 작업으로 ‘한글맞춤법통일안’,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을 차례로 완성했는데요. 사전에 실을 어휘 정리도 마무리되어 막 출판 단계에 이르렀을 때, 조선어학회 사건이 터진 것입니다. 우리말과 글을 말살하고자 했던 일제는 1942년 10월 1일, 독립운동을 위한 비밀 결사 조직으로 몰아 학회를 해산하고 사전 원고를 압수하며 회원들을 검거했습니다. 영문도 모른 채 함경남도 홍원 경찰서로 끌려가 온갖 모진 고문을 당했고 함흥 형무소로 이감되어 고통스런 옥살이를 했습니다. 끌려간 지 약 2년 3개월 만인 1945년 1월 16일, 징역 2년 6개월을 판결받고 수감 중 광복을 맞아 석방되었습니다.

국어 연구와 사전 편찬에 평생을 바치다

선생님은 1896년 경기도 광주군 의곡면 포일리(지금은 의왕시 포일동)에서 태어났습니다. 호는 일석(한 개의 작은 돌), 별명은 대추씨입니다. 키도 작고 몸도 약했지만, 돌처럼 변함없는 의지와 끈기는 남달랐습니다. 1910년 8월 29일, 나라를 빼앗기면서 다니던 학교가 문을 닫게 되었고 그 후 이 학교 저 학교를 옮겨 다니는 방황의 시간이 시작되었습니다. 국어학에 뜻을 두게 된 것은 배움의 길을 잃고 낙향하여 지내던 때였습니다. 빌려 읽던 책 중에서 주시경 선생의 저술을 읽게 되었습니다. “이런 학문도 있구나!” 너무 재미있어서 6번이나 읽은 선생님은 “나도 국어 공부를 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주경야독 끝에 겨우 고등학교는 졸업했지만 학비도, 국어학을 배울 대학도 우리나라에는 없었습니다. 1924년, 우리나라 첫 번째 대학인 경성제국대학이 설립되어 배움의 길이 열리자, 하루 20시간씩 입시 공부를 한 끝에 1925년 30세 최고령으로 ‘조선어학 급 문학과’ 학생이 되었습니다.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신나게 공부한 선생님은 졸업 후, 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 국어와 국문학을 가르치며 본격적인 학자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국어대사전 표지와 내부 일부 사진이다. 연한 청록색 표지에 탑 일러스트와 함께 ‘민중서림’이라는 출판사가 표기되어 있다. 내부 페이지에는 빼곡한 세로쓰기의 본문이 인쇄되어 있다.▲ <국어대사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박꽃 표지와 내부 일부 사진이다. 표지에는 투박하게 그려진 주전자 모양의 그림과 함께 붉은색으로 제목이 인쇄되어 있다. 내부 페이지에는 붉은 인장이 찍혀 있다.▲ <박꽃>,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광복 후에는 조선어학회 중심인물로서 일제 36년 동안 빼앗겼던 ‘우리말 도로 찾기’, ‘국어 교과서 편찬’, ‘한글 강습회’ 활동 등 우리 말글 회복 운동에 앞장섰습니다. 그리고 서울대를 비롯한 여러 대학에서 후배 양성과 학문 활동에 매진하며 남긴 저서들은 국어학의 초석이 되었는데요. 그중 10여 년의 각고 끝에 1961년 펴낸 『국어대사전』은 빼놓을 수 없는 학문적 업적으로 꼽힙니다. 한편 문필가로서 늘 우리말을 아름답게 가꾸었던 선생님은 시집 『박꽃』, 수필집 『벙어리 냉가슴』 등 좋은 작품도 많이 쓰셨습니다. 1962년 정부는 우리 말글을 지키고 바로 세우고자 일생을 바친 선생님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습니다. 1989년 돌아가시던 해, 선생님은 평생 택시 한번 안 타고 모은 재산을 국어학계의 발전을 위해 써달라는 유언을 남기셨고, 그 뜻을 받들어 2003년부터 국어학의 발전에 공헌한 후배 학자들에게 ‘일석국어학상’을 수여하고 있습니다.

오늘 하루, 우리는 맘껏 우리말을 하고 별생각 없이 우리글을 썼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한글은 누군가에는 지켜야 하는 목숨이었습니다. 쉽게 쓰는 우리 말글이지만 결코 쉽게 지켜지지 않았음을 느껴보는 뜻깊은 광복절이 되길 바랍니다.

작성자 : 류순옥, 이고훈(전시해설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