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의 놀이Korean Games』
한글로 놀고, 그림으로 남긴 조선의 놀이
— 『한국의 놀이Korean Games』
책 표지에 새겨진 태극 문양이 유난히 눈길을 끕니다. 제목도, 저자 이름도 없이 오직 태극기만을 담은 이 책은 1895년에 미국에서 출판된 《Korean Games》입니다. 태극기만 새겨진 표지를 넘기면, 알록달록한 그림 속에 조선의 놀이와 한글이 살아 있습니다. 미국의 민속학자 스튜어트 컬린Stewart Culin, 1858–1929이 한국의 전통놀이를 연구해 펴낸 책으로, 우리 민속놀이를 서양에 처음으로 소개한 책입니다. 총 177쪽으로 구성된 이 책은 단 550권만 제작된 한정판이며, 국립한글박물관이 소장한 책에는 저자의 친필 서명과 ‘272호’라는 일련번호가 적혀 있습니다.
컬린은 흥미롭게도 한국을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었습니다.
1893년 미국 시카고에서 열린 ‘콜롬비아 박람회’에서 한국관을 통해 접한 자료와, 통역을 맡았던 한국인 유학생 박용규의 도움을 받아 이 책을 완성했습니다.
그는 한국의 놀이 97가지를 중국과 일본의 놀이와 비교하며, 놀이의 도구와 규칙, 문화적 의미를 민속학적 시각으로 정리했습니다.
이 책에는 조선의 풍속화가 기산 김준근金俊根이 그린 채색 삽화 22점이 실려 있습니다.
김준근은 부산 초량에서 활동했던 화가로, 1886년 로버트 슈펠트 제독의 딸 메리 슈펠트의 주문으로 《기산풍속도》 120폭을 제작했는데, 그중 일부가 《Korean Games》에 수록되었습니다.
이 책에 실린 22점의 원화는 저자 스튜어트 컬린이 관장으로 있었던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 고고학박물관University of Pennsylvania Museum of Archaeology and Anthropology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팽이치기>를 소개하는 그림입니다.
어린이들이 겨울철 얼음판 위에서 팽이를 치며 노는 장면이 생생하게 다가옵니다.
붉은색, 초록색, 보라색 옷차림의 아이들이 채찍을 휘두르는 모습이 마치 지금 막 움직일 것처럼 생동감 있습니다.
오른쪽 위에는 ‘팽이돌니고’라고 한글로 적힌 제목이 보입니다.
놀이 이름의 표기는 《Korean Games》가 지닌 가장 중요한 가치 중 하나입니다.
삽화마다 한글로 제목이 표기되어 있어, 19세기 말 조선에서 사용된 생활 속 한글 표기를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ᄑᆡᆼ이 돌니고(팽이 돌리고), 쟝기두고(장기 두고), 눈싸ᄆᆡ기 ᄒᆞ는 모양(술래잡기 하는 모양), 썅뉵 치는 모양(쌍륙 치는 모양)’과 같이, 지금과는 조금 다른 당대의 표기를 볼 수 있어, 한글의 역사적 변천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됩니다.
본문에는 놀이 이름이 로마자로 적혀 있습니다. ‘팽이’를 ‘Hpaing-i’라고 적고 ‘Tops’라 번역했으며, ‘팽그람’, ‘팽’, ‘팽고’와 같은 여러 형태도 함께 소개했습니다.
이런 형태들은 흥미롭게도 오늘날의 지역 방언인 ‘팽구래미(충북)’, ‘뺑공이(강원)’, ‘펭기(제주)’ 등과도 닮아 있습니다.
컬린은 팽이를 “겨울철 얼음판에서 채찍으로 돌리는 놀이”라고 설명하며, 팽이와 채찍 막대를 만드는 나무는 단군이 하늘에서 내려와 앉았다는 신화 속 나무와 같은 종류라고 덧붙였습니다.
《Korean Games》는 우리나라가 처음으로 참여하여 우리 문물을 세상에 알렸던 1893년 만국박람회에서 맺은 인연으로 탄생한 책입니다. 개항기 조선의 생활문화를 세계에 알린 민속학 보고서이자, 한글과 그림으로 남은 시대의 기록입니다. 태극기로 장식된 표지 한 권에, 조선의 놀이와 한글, 그리고 그 시대의 문화가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권혜은(2022), 『Korean Games』와 기산 김준근 풍속화, 한국민화 16, 72-9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