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대표적인 한글학자를 꼽으라면 우리는 으레 주시경 선생과 최현배 선생을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그 혹독했던 시절, 한글과 독립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신 분들을 일일이 거명하기는 가슴이 벅차오르는 일이다.
이극로 선생 역시 어문 규정과 사전 편찬의 핵심 인물로, 우리들이 결코 잊어서는 안 될 분임에도 2000년대에 들어서야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되었고 2019년 개봉한 영화 <말모이>의 주인공 류정환이 이극로 선생으로 알려지면서 조금씩 세인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실정은 『깁더조선말본』의 김두봉(1889-1958?)을 비롯한 리만규(1889-1978), 정렬모(1895-1967), 홍기문(1904-1992), 김병제(1905-1991), 류열(1919?-?) 등 월북한 국어학자들의 대부분이 동일하다.
▲ 영화 <말모이> 포스터 (제작 더 램프㈜, 출처 네이버 영화)
▲ 「The Korean Problem」, 1927,
세계피압박민족대회에서 한국대표단이 배포한 문건.
독립기념관 사진 제공
고루, 물불의 호를 가진 선생의 생애는 해외에서의 활동과 귀국 후 활동으로 나누어진다.
다른 국어학자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은 선생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자.
선생은 1893년 경남 의령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신학문을 배우고 싶은 마음에 국권회복 단체인 대동청년단에 가입하였고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마산 창신학교에서 2년간 고학으로 공부한다.
병술국치를 맞아 1911년 독립군이 되기 위해 무일푼의 혈혈단신으로 만주로 향하게 되는데 그곳에서 대종교 간부 윤세복의 도움으로 동창학교의 교원 생활을 하였고 1913년 군사학을 배우기 위해 러시아로 갔으나 제1차 세계대전 발발로 간도로 돌아와서 백산학교에서 독립군(1915)으로 활동하다 마적들에게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하였다.
선생은 학업에 대한 열망으로 상해의 독일인이 경영하던 동제대학에 입학하여 1920년 예과를 졸업하였는데 그 당시 상해 유학생 총무로 임시정부 요인을 도왔다고 한다.
다시 우여곡절 끝에 1922년 베를린대학 철학부에 입학하여 정치학과 경제학을 전공으로 하며 철학, 인류학, 언어학을 수학하였다.
베를린 유학 시절 1923년의 재독한인대회에서 조선의 독립을 역설하였고, 1924년에는 조선의 독립운동과 일본을 침략정책을 저술하고, 1927년 벨기에 세계피압박민족대회에서 조선대표 단장으로 이미륵·김법린 등과 함께 참석하여 일제의 식민 지배 실상을 폭로하였으며, 같은 해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한
『조선의 독립 투쟁』을 발간하였다.
한편 1925년부터 유럽인 대상의 조선어 강좌에서 우리말을 가르쳤다.
선생은 독일이 폴란드를 지배하며 그 말을 말살하고 영국이 아일랜드의 켈트어를 말살하였듯 일본으로부터 조선어를 지키기 위한 각오를 다지고 모국어를 잃으면 민족성을 잃게 됨을 강조하였다.
▲ 「The Korean Problem」, 1927, 세계피압박민족대회에서 한국대표단이 배포한 문건. 독립기념관 제공
1927년 베를린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고 그해 11월 런던대학 정치경제학부에 입학하여 한 학기 수학하고, 다시 베를린대학으로 돌아와 언어학과 음성학을 연구하였으며, 파리대학 음성학부 실험실에서 조선어음을 연구하였다.
이때의 연구를 바탕으로 1947년 발간한
『실험도해 조선어 음성학』 서문에 “이 책을 쓰게 된 것은 내가 일찍이 베를린, 파리, 런던에서 여러 음성학자로 더불어 조선어 음성을 논한 바 있었는데 그 중에도 특히 파리대학 음성학 실험실에서 서력 1928년 봄에 일 개월 동안 스라메크 교수의 청으로 나는 조선어 음성의 실험 대상이 되어 매일 6시간씩 실험실에 앉았던 일이 있다.”라고 하였다.
이 책은 우리나라에서는 최초의 실험음성학 연구서라는 의미를 갖는다.
▲ 「실험 도해 조선어 음성학」 (1947). 국립한글박물관 소장
1929년 1월 귀국한 선생은 곧바로 조선어사전편찬회를 조직한 뒤 14년간 사전 편찬에 헌신하며 조선어학회를 이끌어갔다.
김성수가 보성전문학교 교장 자리를 부탁하였으나 자신이 할 일은 조선어학회 사업뿐이라며 사양할 정도로 매진하였다.
먼저 사전 편찬을 위하여 맞춤법 통일안을 제정하였는데, 3년 동안 125차례 433시간을 논의하여 1933년 한글날 공포하였다.
선생은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만드는 과정에서 제정위원, 수정위원, 수정 소위원, 정리위원으로 전 과정에 참여해 학자들의 상반된 의견을 조율하는데 온갖 노력을 다하였다.
▲ 조선어학회 표준말사정위원회 1독회 기념 사진
(1935.1.4.) 한글학회 사진 제공
▲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
(조선어학회, 1936). 국립한글박물관 소장
다음 작업인 표준어 제정에 있어서도 1934년 12월 2일 학회 안에 표준어사정위원회를 구성하여 1935년 1월 2일부터 6일까지 제1독회를 열어 4000여 개의 낱말을 수정하였고, 8월 5일부터 9일까지 제2독회를, 1936년 7월 6일부터 8월 1일까지 제3독회를 개최하여 6231개 표준어 사정을 완료하였다.
10월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을 간행하는 모든 과정을 선생이 주도하였고, 1940년 6월 25일에는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을 제정하였다.
수년간 이러한 작업을 꾸준히 진행하기 위해 자금을 모으는 일도 선생의 몫이었다.
선생은 1935년 건축업자 정세권으로부터 화동의 건물을 기증받았고 1936년에는 동향 출신 사업가 이우식을 중심으로 14명의 후원회 결성을 추진하였다.
1936년부터 본격적인 사전 편찬을 전담하면서 일제의 갖은 고초를 이겨내고, 1939년 16만 어휘 3천여 매를 완성하였다.
1940년 3월 7일 조선총독부에 조선어사전 출판허가원을 제출하였고 삭제와 정정을 조건으로 3월 13일 출판 허가를 받았다.
1942년 대동출판사에 사전 원고 일부가 넘겨져 조판해 들어갔으나 같은 해 10월 1일 일제가 조작한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어문운동을 한 사람들이 투옥되고 사전 편찬은 중단되었다.
▲ 조선말 큰사전 원고(1929~1942).
독립기념관 사진 제공
▲ 일제강점기 경성지방법원에서의 조선인 재판 광경
이극로 선생은 조선어학회의 책임자였기에 1942년 12월 21일부터 1945년 1월 16일까지 9회의 공판 결과 징역 6년이라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끌려간 회원들 가운데 가장 무거운 판결을 언도받았다.
함흥경찰서 수감 중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고문을 받아, 광복으로 출옥한 뒤로도 악형의 후유증으로 수년간 고생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출옥 직후부터 바로 사전 출판을 추진하여 1947년 마침내 제1권이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 「조선말 큰사전」(을유문화사, 1947)
국립한글박물관 소장
▲ 경성역, 서울역사박물관 사진 제공
* 1945년 9월 8일 경성역 창고에서 조선말 큰사전 원고를 되찾았다.
▲ 「고투사십년」 (1947). 국립한글박물관 소장
선생은 서간도 교사 시절 주시경 선생의 제자인 김영숙(1886-1952)에게 한글 연구의 도움을 받았고 1919년 상해로 가서는 김두봉이 창안한 한글 자모 분할체 활자를 만들기 위해 김두봉과 함께 상무인서관 인쇄소를 다녔다.
1920년에는 김두봉을 도와 『중러한회화』를 저작하는 등 한글에 있어서는 김두봉의 영향을, 민족사상에 있어서는 간도에서 만난 박은식과 신채호에게 감화 받았다.
몇 번이나 죽음의 고비를 극복한 선생의 생애는 그의 자서전 『고투 40년』 의 제목처럼 한마디로 쓰디쓴 투쟁의 연속이었다.
자서전에 빠른 호흡으로 기술되어 있는 지난한 대장정에서 느낄 수 있듯이 그의 모든 학문과 활동의 족적은 오직 나라의 독립과 근대화, 부강한 민족에 대한 염원으로 귀결된다.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겪은 소회의 말에서 선생의 강한 민족애를 느낄 수 있다.
▲ 「고투사십년」 (1947). 국립한글박물관 소장
“시베리아에서 얼음을 깎던 겨울철의 칼날바람에 살을 에어가는 듯하는 고와 몽골사막의 모래에 달구어 나오는 여름철의 불꽃같은 바람에 살을 익히는 고를 맛보아 대자연의 위력과 싸우고 사는 인고단련하는 어떠한 역경에도 살아갈 수 있는 백성이 되어야 한다.”
<작성: 유호선 연구교육과 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