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의 한글문화 인물은 최현배·이극로 선생같은 한글 학자가 아닌, 건축가이다.
정세권鄭世權(1888~1965) 선생은 일제 강점기 일제의 경성 개발에 맞서 종로구 일대에 대규모 한옥 지구를 만든 인물이다.
건축가가 한글문화 인물에 선정된 이유를 알기 위해, 그의 생애를 따라가 본다.
정세권 선생은 1888년 경남 고성에서 태어나 진주사범학교, 낙육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1910년 고성군 하이면 면장이 되었다.
그는 단 2년 만에 우수면장으로 선정되었으나, 일제로부터 핍박받는 주민들이 마음에 걸려 사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19년 경성으로 올라온 그는 이듬해에 건축회사인 건양사를 창립하였고, 종로구 누동궁과 완화궁 사저를 매입하여 조선집(한옥)을 지었다.
천원을 종잣돈 삼아 건설한 정세권 선생의 한옥은 엄청난 인기를 구가했고, 짓는 족족 팔려나가 건축을 위해 대출한 금전을 모두 갚고도 많은 이재를 남겼다.
▲ 매일신보 10306호 1936년 5월21일 기사.
정세권 선생이 흰 두루마기를 입고 있다.
1936년 《매일신보》에는 당시 성공한 사업가를 만나 그 비결을 들어보는 기획기사 〈나는 어ᄯᅥ케 成功하얏나〉를 연재했다.
해당 기획기사의 5번째 주인공은 정세권 선생으로, 「집값 폭락 시대의 무시무시한 ‘그ᄯᅢ’를 말하는 건양사주 정세권씨」라는 소제목이 달려 있다.
해당 기사 꼭지의 사업가들은 사진을 하나씩 수록했는데, 대부분 양장을 한 증명사진을 넣었고 박문서관과 몇몇은 자신의 가게 사진을 넣었다.
그러나 다른 사업가들과 달리 정세권 선생은 하얀 두루마기를 입고 있는 전신사진을 넣었다.
깨끗한 두루마기를 입고 정면을 응시한 그의 표정은 어딘가 모르게 결연해 보인다.
이 기사에는 정세권 선생이 천원을 종자돈으로 하여 건양사를 설립한 일화와, 20년 가까이 한옥을 건축하면서 한 번도 손해를 본 일이 없었다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손해를 보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집값이 떨어졌을 때도 꾸준히 건축하였고 수요가 충분했으므로 집을 지은 직후 바로 팔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은행이자와 원금은 조금씩 갚아나갔고, 집의 시세가 복구되었을 때 그 손해를 만회하고 큰 이익을 볼 수 있었다.
해당 기사로 본 그의 행보는 여느 사업가와 다를 바 없는 것이었다.
건축 직후 즉각 매도라는, 그 누구보다 대범한 전략을 사용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 화동 조선어학회 터.
▲ 조선어학회 발행 잡지 《한글》 3권 6호 기사.
– 정세권 선생이 기증한 새 회관으로 터전을 옮긴다는 내용.
그는 한옥을 팔아 번 돈을 자신이나 가족의 풍족함을 위해 사용하지 않았다.
정세권 선생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 단체인 신간회에서 활동하는 한편, 조선물산 장려회에서 1929년부터 5년여 동안 상무 이사를 맡는 등 조선 물산장려 운동에도 참여했다.
1929년 12월, 조선물산 장려회의 주최로 열린 강연에서 한글학자 이극로李克魯(1893~1978) 선생은 조선어학회 활동 중 《조선말 큰 사전》의 완성을 피력하였다.
그 자리에서 정세권 선생은 이극로 선생과 조선어학회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몇 개월 후 정세권 선생은 사전 편찬원의 모임을 확인하고, 이들의 모임이 10여 년 동안 지속되는 것을 지켜보며 조선어학회의 활동을 후원하기 시작했다.
조선어학회에서 발행하는 기관지인 《한글》 3권 6호에 수록된 기사 〈朝鮮語學會의 新會館!〉을 통해, 정세권 선생이 종로구 화동에 지은 건물을 조선어학회에 기증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정세권 선생의 따님 정남식씨에게는 이런 기억이 있다.
“아버지가 어느 날 집에 오셔서 말씀하셨어요.
‘총독부가 불러서 들어갔더니
나 보고 왜 한옥만을 건설하느냐고 묻더구나.
우선 무시하고 들어왔다.’
(중략)
총독부가 지속적으로 아버지에게 일식 주택을 건설하라고 압력을 가했습니다.
아버지는 일본 주택은 절대 지을 수 없다면서,
1940년부터 해방 때까지 주택 사업에 손을 대지 않으셨어요.”
- 2015년 10월 16일 막내 따님 정남식 님 인터뷰 중 -
일본 주택을 지으면 돈을 더 벌 수 있었음에도, 총독부의 압박 이후 정세권 선생은 아예 주택 사업을 중단해 버렸다.
이제 우리는 앞서 보았던 1936년 〈나는 어ᄯᅥ케 成功하얏나〉의 사진 속 정세권 선생의 흰 두루마기와 결연한 표정에서 어떤 의지를 읽어낼 수 있다.
한옥이 아니면 짓지 않겠다는 의지, 조선어학회의 활동을 계속 후원하겠다는 의지 말이다.
이러한 활동 탓에 그는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고문을 당하고, 서울시 광진구 자양동 일대의 대규모 토지 등 개인 재산을 일제에 의해 강탈당하였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고초를 겪은 회원들을 모아 십일회를 결성하여 조선어학회에 대한 지원을 지속하였고, 결국 1957년 《큰 사전》의 간행을 이끌어 냈다.
이상, 한옥을 팔아 번 큰돈을 조선어학회의 사전 편찬 활동에 희사한 이 달의 한글문화 인물 정세권 선생의 생애를 따라가 보았다.
그가 사후에 남긴 것은 《큰 사전》과 쌀되, 밥공기, 수저 한 벌뿐이었다고 전해진다.
하얀 두루마기를 즐겨 입고 굳이 한옥을 짓던 건축가 정세권, 사재를 털어 한글을 지킨 그의 정신은 한글을 사용하는 우리의 마음에 길이 남아 있을 것이다.
<작성: 김은슬 학예연구사>
※ 참고한 기사
국립중앙도서관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나는 어ᄯᅥ케 成功하얏나〉, 《매일신보》 (1936.5.21.)
김경민,
〈건양사, 경성 건설 40년의 역사〉, 《프레시안》 (2016.1.7.)
김경민,
〈감격의 큰사전〉, 《프레시안》 (2016.4.8.)